월터 콘래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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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콘래드 (Walter Conrad) 씨는 한국전 참전 용사이자 캐나다 군인이며 지치지 않는 봉사자입니다. 그는 오타와에 있는 한국전 참전 용사회 7지회의 제2부회장입니다. 콘래드 씨는 캐나다 전쟁 박물관에서 일주일에 3일씩 관광객들에게 가이드를 해주는 봉사를 22년간 지속했습니다. 또한 수도 합창단의 단원이기도 합니다. 콘래드 씨는 지난 2013년 한국전 참전 용사의 해를 맞아캐나다 전쟁 박물관에서 열린 갈라 행사에서 합창을 위한 참전 용사 합창단을 조직했습니다. 콘래드 씨는 한국전 참전 동료들의 장례식에서 Poppy Services에 참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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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아나 웡 (Tiana Wong) 은 BC주 밴쿠버에 살고 있습니다. 티아나는 미술, 글쓰기, 일기, 수영, 수도쿠, 피아노, 드래곤보트, 그리고 자원봉사에 관심이 있다. 티아나는 자신이 열정적이고, 다정하고, 털털하다고 표현합니다. 티아나는 중국계 캐나다인이며 남동생이 있고 훌륭한 부모님이 있습니다. 티아나는 항상 자신의 마음을 따르고 직관을 믿습니다. 그녀는 밖에 머무는 것, 개들, 수프 마시기, 여행하기, 또는 음악 들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월터 콘래드

글쓴이: 티아나 웡

1929년생인 월터 콘래드 씨는 PEI의 샬롯타운에서 자랐으며 집안의 유일한 남자 아이였습니다. 월트의 가족 중 월트가 9살 무렵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월트의 아버지는 소령으로 강등했습니다. 아버지가 참전했을 때, 월트는 가족 내에 남성적인 역할을 맡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으며 16살 때 가족들을 이끌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나중에는 한국전에 참전했지만, 월트는 자기 자신에 대해 겨울에는 학교에 다니고 여름에는 농장에서 일을 하는 평범한 소년으로 설명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월트는 캐나다 왕립 군사 대학에 다니기 전에 웨일스의 프린스턴으로 떠났습니다.

월트가 학교에 다닐 때, 월트는 엔지니어가 되고 싶었지만 미적분에 자신있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로 예과로 옮겼지만 곧 역사에서 즐거움을 발견했습니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월트는 하키나 풋볼처럼 육체적인 운동에 적극적이었지만 월트의 여동생은 발레에 더 관심을 보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1년 후, 월트는 동료 참전 용사인 클라우드와 RCR연대에서 Van Doos를 상대로 한 하키 경기에서 수비수로 참여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하키와 함께, 워트는 음악적이었기 때문에 피아노도 연주했습니다. 여름 휴가 동안, 월트는 할머니가 살았던 근처의 포인트 프림 농장에서 일했습니다. 월트는 할머니와 친하게 지냈고 할머니를 “훌륭한 여성, 재미있는 여성”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안타깝게도, 할머니는 1951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던 중인 23살 때, 월트는 핼리팩스로 서류를 보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월트는 개인 자격으로, 한국에 도착하기 전 밴쿠버에 도착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월트는 나라를 보고 싶었고 보병 지휘를 꿈꿨습니다. 전쟁이 계속 중이던 한국에 상륙한지 30분이 지나 부산에 도착하자 전쟁이 끝났습니다.

그 후, 퀸즈 대학 입학을 위해 돌아가기 전 1년간 한국에서 머물렀고 군대로 복귀하기 전 문학 학사로 학교를 마쳤습니다. 월트는 퀘벡에서 기갑 부대에 복무했습니다. 그곳에서 일하면서, 월트는 그만두려고도 하고 본부, 보병, 그리고 탱크에서 참모 장교로 일했습니다. 콘래드 씨는 왕립 캐나다 연대의 7번 부교를 지휘했습니다. 겨울에 운전을 하다보니 생각보다 추워서 본부에서 일하는 것만큼 즐겁지는 않았습니다. 추가적으로, 월트는 온타리오주 런던 출신의 여성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교사로 일했고 나중에는 월트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월트의 가장 소중한 기억들 중 하나는 처칠로 발령받아 2년간 지냈던 것이며 매우 운이 좋다고 느끼게 했습니다. 오늘날까지, 월트는 “완전히 훌륭했다” 라고 돌아봅니다. 그는 심지어 북극과 캠프를 향해 갈 기회도 있었는데, “춥고 생각보다 어둡지 않다”고 묘사했습니다. 월트는 한때 캠프를 떠나기 위해 북극곰들을 쫒아내야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북극곰들을 향해 발포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서 대화를 했습니다. 월트는 두마리의 새끼 곰들과 함께 있는 어미 곰을 설득하려고 했지만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북극곰들은 캠프에서 떠났고 아무도 공격받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몇 년 후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한국 사람들은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아침 7시에 오타와에서 온 400명의 참전 용사들이 탄 4대의 버스는 각 방향에 45명의 참전 용사들이 탄 2대의 오토바이들의 호위를 받았습니다. 서울을 가로질러 4차선 고속도로를 따라가며 월트는 교통을 멈춘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창밖을 내다보니 경례하는 한국인들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참전 용사들은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음식을 제공받고 깨끗한 건물에서 머물렀습니다. 월트는 한국을 총 3번 방문했습니다. 월트가 딸과 한국에 방문했을 때, 부녀는 38선을 방문했습니다. 38선은 서울에서 약 4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그는 숲이 있었던 곳을 가리켰습니다. 캐나다와 달리 전쟁 중에는 잎이 없었습니다. 한때 파괴됐었지만 재건된 완전히 변한 나라였습니다. 월트는 특히 난민들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난민들은 갈 곳이 없었고 판자 조각 밑에서 지냈습니다. 월트는 그들이 얼마나 잘 적응했는지 놀랐었습니다. 18개국이 참전한 가운데, 3년 동안 벌어진 거칠고 잔혹한 전쟁이 분명했습니다.

인터뷰 마지막에 저는 월트의 용감함, 공감 능력 그리고 친절함에 깜짝 놀랐습니다. 월트와 이야기하기 전에는, 저는 학교에서 배운 것 이외에는 한국전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제 저는, 월트가 전쟁에 참전했을 때, 저나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었다는 것을 알게됐습니다. 게다가, 한국에 도착한 후 곧 휴전협정이 체결됐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태로 외국으로 혼자 갈 때의 마음이 어떨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진짜 전쟁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더 나은 시각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세월은 한국 뿐만 아니라 캐나다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월트는 종종 한국인들의 회복력을 언급했습니다. 힘든 시절이 있었지만 아무것도 없었던 그들은 여전히 그 힘든 시기를 인내하고 함께 헤쳐나갈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전에 대해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월트의 이야기를 듣고 웃을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저는 세대간의 통합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에 감사하며, 기여해주신 모든 분들께 자부심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