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광준
차광준: 의미로 본 나의 이민 이야기
내 나이 24세 되던 1965년,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는 일거리가 없었다. 독일(당시 West Germany)의 광부 모집에 선발되어 독일 광부로 가게 되었다. 지하 1000미터에서 힘든 일을 했지만, 급료가 좋아서 기쁜 마음으로 일했다. 1966년 10월 어느날, 학교 후배 인숙이가 간호원으로 독일에 왔다. 참으로 반가웠고, 우리는 당연히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1977년 10월 14일 결혼을 했다. 독일 광부 3년 계약을 마칠 무렵 캐나다 이민 문호가 열렸다. 우리 부부는 이민 신청을 했고, 어렵지않게 이민 허락을 받았다. 1968년 11월 8일 캐나다행 비행기를 탔다.
아내와 함께 첫 발을 내디딘 캘거리 공항의 1968년 11월 8일은 몹시 춥고 싸락눈이 흩뿌리며 거센 바람까지 불고 있었다. 비행기 트랩을 내려 임시 수용소 같은 터미널 건물까지 걸어 들어가는 시간은 불과 5분 정도였지만, 너무 추워서 나는 아내의귀를 뒤에서 손으로 감싸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 5분동안 걸어 들어가면서 나는 시베리아에 유배되어 손을 호호 불며 글을 쓰던 닥터 지바고의 거실 창문을 두드리며 지나가던 바람소리를 들었고, 건물 안의 따스함은 그 지바고의 방, 난로 위에서 푸푸 거리며 수증기를 뿜어내던 주전자를 연상하게 했다.
아! 나는 순간, 그 아주 짧은 순간, “나는 혹시 이곳에 유배되어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을 했다. 우리들의 캐나다 이민 생활은 이렇게 시작됐다.
캐나다는 모든 것이 풍부했고, 일이 많았고, 정부에서 하는 일들이 모두 시민을 위한 것 같이 느껴졌다. 나와 아내는 도착한지 채 일주일도 되기 전에 노동인력 알선으로 직장을 얻었다. 나는 기계 공장에서 기술자로, 아내는 양로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언어의 장벽, 이민족, 이질적인 문화 때문에 힘들었지만, 나와 아내는 그래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성실히 일해 직장상사나 동료들의 호감을 받으며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잘 짜여진 이 사회의 틀 안에서 조용히 순응하며 살았다. 그렇게 사노라니 자연히 삶이 안정되어 갔다. 1969년 10월 17일에는 내 딸(Sandra, 소영이라는 이름을 지었다)이 태어났다. 내 일생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1972년 10월 15일 캘거리에 한인 교회가 창립되었다. 나는 이 교회를 다니며 하나님을 통하여 많은 사랑을 받으며 살고있다. 1974년 5월 9일 드디어 캐나다 시민권을 받게 되었다. 조국을 떠나 이민생활을 하며 국제 떠돌이 (디아스포라)라는 서글픔이 가슴 한 자락에 스며 있었는데 시민권을 획득하고나서 나는 캐나다인이라는 소속감으로 가슴이 뿌듯했다.
“나”라는 사람이 이 나라, 나아가서 이 세상에 어떤 의미인가를 심각하게 생각해 본적은 없지만 지금까지 내 생애의 대부분을 이 땅에 살면서 좋은 모범 시민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나름 소박한 꿈과 목적은 있었다. 내가 스스로 택한 제 2의 삶의 터전, 캐나다는 세계에서 제일 살기 좋은 나라이었기에 내 꿈이 실현됐다고 생각했고, 복합 문화 정책을 시행하고 있는 이 나라의 구성원으로써의 손색없는 존재이니, 이것이라면 내 삶의 좋은 의미가 되지 않을까?
내겐 목적이 있다. 아니 바램이라는 것이 좋겠다.
내 나이 76, 남은 생을 이 세상에 어떤 큰 공헌은 못할지라도 해로운 인간으로 살지는 말자, 그리고 나와 내 아내 사이에서 태어나 이 세상을 이어갈 내 자식들이 건강하고, 착하고, 밝게, 그리고 이 사회에 유익한 인물들로 사는 것, 이것이 나의 큰 바램이다.
아쉬움도 있다.
젊은 시절을 이방인의 굴레 안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숨차게 달려오느라 내가 좋아하는 그림과 서예를 못해보고 지내왔다. 억지로 틈을 내어 시도 했으면 못할 것도 없었을 터인데하는 아쉬움…
지금까지 살아온 내 캐나다의 삶을 되돌아 본다. 후회는 없다. 이 곳 한인사회에서 한인회장으로 봉사도 했고, 교회에서 장로로 헌신도 했다. 지금 내 남은 생은 온통 “삶”이라는 글씨로 꽉 차 있어서 여백이 없을 줄 알았는데, 내가 모든 직업에서 은퇴를 하고 올려다 본 하늘엔 아직도 내가 다 쓰지 못한 공간이 하얗게 남아있었다. 여백, 그렇다. 그 여백은 내 다하지 못한 사랑으로 인하여 비어있을 것이다. 그 사랑이 내 여백에 채워지는 날 나는 비로서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를 다 하게 되는게 아닐까.
이 여백에
내가 부르지 못하고 살아온
사랑하는 이름들
대한민국
캐나다
라고 써 넣자
그리고
눈을 감아야만 보이는
고향의 초가 지붕 위에
둥근 박도 그려놓고
빨간 고추도 널어놓자.
어릴적 뛰어 놀던
동무들과 산천의 이름들을
가득 써 놓자.
아! 나의
그리운 이들이여
사랑하는 이들이여
캐나다 150주년을 기념하며
연아마틴 상원의원께
캘거리 주민 차 광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