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달
귀하에게 한국계 캐나다인은 무슨 의미입니까?
저는 캐나다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초기이민자로서 우리의 2세, 3세의 장래가 보다 보람있는 삶이 되도록 연결해주는 다리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튼튼한 다리 역할을 하려고 최선을 다 해 왔습니다. 또한 캐나다의 복합문화사회에서 전문적인 기술인력으로 또 한국인으로 귀중한 공헌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캐나다 150주년은 귀하에게 무슨 의미입니까?
“150년의 역사”는 우리와 같은 아시아인에게는 비교적 짧은 역사입니다. 그래서 별로 큰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캐나다 역사”를 강의하면서 보다 심도있게 캐나다의 역사를 연구하게 되었고, 오늘날의 캐나다가 있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희생했고, 의미있는 일들을 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였습니다.
알리고 싶은 귀하의 캐나다 이민 이야기.
저희는 딸 둘, 아들 하나를 키웠습니다. 낯설고 새로운 나라에서 세 아이를 키우고 교육 시키는 일은 어느 가정에서나 쉬운 일이 아니지요. 특히 직업을 가지고 일하면서 자라나는 아이들을 돌보는 엄마의 역할은 한층 더 힘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2세들이 모두 성장해서 캐나다인으로써 자부심을 가지고, 3세를 키워가는 모습을 보면서 아주 보람을 느낍니다. 특히 2세, 3세는 캐나다 친구들도 많이 있고, 사회적으로 여러가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어 그들은 우리보다 더 행복하고 보람있는 캐나다에서의 삶을 살고 사회에 더 큰 공헌도 많이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혹은 무슨 이유로 캐나다에 오시기로 결심하셨습니까?
1971 알버타 대학으로 유학을 오게 되었고, 캐나다에서 공부하는 과정에 “아름다운 캐나다”에서 영주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가족도 왔지요.
귀하의 캐나다에 대한 첫 인상이나 기억나는 경험은 무엇입니까?
대지가 광활하고 높은 로키산맥의 절경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캐나다에서의 삶에 가장 어려운 것 혹은 가장 행복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1971년부터 1983년까지 에드먼턴에서 살았는데, 그 당시는 아주 춥고 긴 겨울이 모두를 힘들게 했습니다. 요즘은 지구온난화 현상 덕분에 겨울이 많이 온화해졌고, 눈도 적게 오지만, 1970년대의 에드먼턴은 10월에 온 눈이 다음 해 4월까지 녹지 않았고, 영하 20도 이하일 때가 많았습니다. 특히 그 추운 겨울 밤에 바람빠진 자동차 타이어를 가는 일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캐나다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는 가족 모두가 함께 밴프-자스퍼 국립공원은 물론이고, 여기저기 아름다운 곳들을 방문하며 캠핑을 하던 일, 세계적으로 훌륭한 스키장에서 스키타며 즐기던 일들이 무엇보다도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자란 후에는 여름이 짧기는 하지만, 5-6개월동안 진행되는 골프 시즌이 저를 행복하게 해줍니다.
존경하는 한국계 캐나다인에 대한 이야기
일반적으로 1960-70년대에 캐나다로 온 1세대 한국 이민자들은 경제적으로 어렵게 시작했고, 언어능력이 약해서1980년대 이후에 온 한국 이민자들에 비하여 캐나다 사회에 적응하는데 많이 힘들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희생과 열정을 가지고 캐나다 업계에서 열심히 일해왔고, 2세의 장래를 위하여 최선을 다해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면에서 그들 모두를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