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 러쉬 턴


로이 러쉬 턴: 한국 전쟁 참전 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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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99세를 맞은 로이 러쉬턴씨가 캐나다 건국 150주년을 맞아 한국 전쟁에 참여했으며 현재는 전 세계 곳곳에 지내고 있는 전우들에게 인사를 보냈습니다. 올해 1월 99세 생일을 맞은 로이 러쉬턴씨는 고령의 나이로 인해 현재 노바스코샤주의 Pictou Sutherland Harris 기념 병원의 재향 군인 병동에서 요양중 입니다.  

세계 2차대전과 한국전쟁 둘다 참전한 로이 러쉬턴씨가 프랑스와 벨기에 그리고 네덜란드에서 직접 겪은 2차대전 경험은 1951년 1월 한국전쟁에 투입된 프린세스 패트리샤의 캐나다 라이트 보병부대의 2대대 2중대의 장교 그리고 병사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소중한 가치가 되었습니다.

고령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참전 군인으로서 오랜 시간동안 놀랄만큼 활발한 활동을 이어왔던 로이 러쉬턴씨는 2년전부터 겪어온 기립성 저혈압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었으며 어느정도 회복되어 오던 척추 골절과 오랜 시간의 치료를 거처 호전되었던 발 부상 또한 지난 겨울을 기점으로 다시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건강상의 문제와 고령으로 인한 거동의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로이 러쉬턴씨는 아직도 한국에서 함께 복무한 전우들을 기억하고 있으며 한국전쟁에 함께 참여했던 모든 동맹군 전우들에게 응원의 메세지를 전하고 싶다는 메세지를 가족과 아들 로버트씨를 통해 전했습니다.

로이 러쉬턴씨는 공산주의의 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해 싸운 것에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 “캐나다와 다른 여러 나라에 있는 모든 전우들이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한국과 한국 사람들은 우리가 목숨을 바칠 이유로 충분했습니다. 한국 전쟁 이후 많은 시간이 흐르고 다시 방문한 한국은 엄청난 변화로 인해 큰 놀라움을 줬으며 서울은 마치 더 큰 토론토 같더군요. 사람들도 자유롭게 지내고 친절했습니다. 건국 150주년을 맞는 조국과 또한 그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한 군인으로서, 저는 캐나다가 참전한 두 차례의 전쟁에 캐나다를 위해 참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또한 우리가 가진 이 자유에 깊이 감사하며 타의가 아닌 자의로 유럽의 여러 국가들과 대한민국을 도울 수 있었던 것에도 정말 감사합니다. 나의 모든 전우들이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즐거운 삶을 살고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도 그렇게 살기를 희망합니다.

누구보다도 가장 모험적인 삶을 살던 로이 러쉬턴씨는 두 차례의 참전을 끝으로 고향인 캐나다 노바스코샤주의 픽토우 지방으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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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차례의 전쟁은 비록 로이 러쉬턴씨을 지치게 만들었지만 그는 그  몇년을절대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그의 사랑스러운 가족이 2017년 아버지의 날을 맞아 모여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유럽에서 싸운 그는 전쟁에서  돌아 온 후 노바스코티아 솔트 스프링의  작은 도시에서 편의점을 운영했습니다. 1950년 8월, 캐나다 정부가  한국에서 싸울 특수부대보병여단 지원자 모집 광고를 냈습니다.  한국 전쟁에 대한 뉴스를 듣고 있던 로이는 편의점 열쇠를 어머니에게 넘겨주고 바로 달려가 부대에 입대했습니다. 2차대전에서 낙하산병 이었던 로이는 프린세스 패트리샤의  캐네디언라이트 보병부대 2중대에 배치되었습다.  2차 세계대전에서의  경험과 보병 기술 및 지식을 바탕으로 특수부대에 입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차세계대전 이야기

1939년 로이는  21살의 나이로 군대에 입대해 보병부대에서 근무했습니다. 이후1942년 캐나다 정부는 영국 육군 제6 공수부대 제3낙하산 여단의 일부가 될 첫 번째 캐네디언 낙하산 대대 항공 훈련 지원자들을 모집했습니다. 이 캐네디언 대대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시작보다 몇시간 먼저 적진으로 뛰어드는 첫 번째 부대였습니다. 영국의 알베말 항공기를 타고 낙하지점으로 이동한 로이는 다른 항공기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측면 문이  아니라 하단  출구를 통해 낙하하게 되었습니다. 차가운 밤 공기의 거센 저항과  적비행기들의 함대 공격으로 아군 비행기들은 격추되고 경로를 이탈했습니다. 공수부대 원들은 여러 지역으로 산란됐고 한 곳에서의 집합도 어려워 졌습니다.  로이는 부상을 당했고 대대 담임 목사는 낙하산이 펴지지 않아 전사했습니다. 적들이 부대에 반격을 가했지만 부대원들에게는 대응할 충분한 무기도 없었습니다.  2개월이 넘는 동안 로이가 속한 대대는 프랑스에 낙하했던  전체 인원의 절반이 넘는  300여명의 군인들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부대를 재편성하고 훈련했습니다. 낙하산 부대원으로서의 자격을 갖춘 병사들로 병력을 다시 채우는 일은 아주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 날 로이의 부대는  ‘벌지전투’에서 적들의 공격 을 막기 위해  벨기에의 아르덴 숲속에 배치되었습니다.  그들은 이 전투에 참여한 유일한 캐나다 군인들이었습니다 . 그리고  1945년 3월  로이의 부대는 네덜란드 라인 공격을 위한  공수작전에  보강된 인원으로 다시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로이는 당시 전투에서 얻은 허벅지 부상의 파편을1950년 11월의 한국에서  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Roy Rushton, with his Enfield sniper’s rifle in Holland, in 1945.

Roy Rushton, with his Enfield sniper’s rifle in Holland, in 1945.

로이 러쉬 턴, 1945년 네덜란드 엔 필드에서 그의 저격수 소총과 함께, 2015년 로이는 1944년 초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의 활약으로 프랑스의  뢰지옹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

1950년, 로이는 노바스코샤의 다른 2차세계대전 참가자들과 함께 캐나다 육군에 돌아가 상등병 계급과 함께 보병부대의 지휘관이 되었습니다. 그는 캐나다에서의 훈련을 통해 젊은 신병들을 부대에 배속시켰으며  3개월 후 그들이 한국에 상륙했을 때에는 부산 가까이에 있는 Mariang  라인의 병사들보다 더 많은 훈련을 하게 했습니다. 그 신병들은 모두 로이가 과거 전쟁의 화염 속에서 얻은 본능적 인 감각과 지식에 엄청난 도움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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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은 1950년 9월,  11월에 있을 한국 출발을 앞두고 워싱턴 주 포트 루이스에서 진행될 사전 훈련을 위해 도착한 프린세스 패트리샤의 캐네디언 라이트 보병부대,  2대대에  소속된 10개 지방 대표 병사들을 담고 있습니다. 상등병 로이는 가슴에 낙하난 부대의 날개를 달고 오른 쪽으로 부터 네 번째에 서 있습니다.  왼쪽 부터 10명의 군인들은Johny Sandulescu(매니토바), Alfred Zurnevra(온타리오), David Benoit(브리티쉬 컬럼비아),  Jack McKee(매니토바), Charles Young(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 Edward MacKie(Newfoundland), Roy Rushton(Nova Scotia),; Kenneth Umpherville(Alberta), Fred Ruddick(New Brunswick), and Rudy Howitt(Quebec) 입니다.

  25보병여단 특수부대의 다른 부대들은 1951년 5월 까지 캐나다에 남아 있었지만 로이가 속한 대대는1950년 11월 한국으로 파병되었습니다. 10개 소대로 구성된D중대에서, 로이는 부대의 두번째 적 진지  공격에 지휘관으로 참가했습니다.  그 전투는 병사들이 훈련 받은 매뉴얼 대신 로이와 같은 베테랑들의 지식과 임기응변적인 전술 사용을 배운 전투 중의 하나였습니다. 적들은 항상 아군에 비해 수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패트리샤는 50명이 조금 넘는 단 두 개의 소대로 강력한 방어진을 구축한 언덕을 공격했습니다.  공격 전에 로이와 그의 소대 장Al Wagstaff 은 만약Wagstaff이 잘 못 되면 로이가 전체 소대를 지휘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Wagner가 무릎에 동맥이 찢어지는 치명적인 총상입 입었던 것입니다.  만약 의무병 도날드 코플리(전쟁 후 의사가 된) 의 즉각적인 응급 처지가 없었다면 그는 아마 죽었을 것입니다.  로이는 두 소대 모두를 집결 시켜 전력을 다한 공격을 계속했습니다.  그는 부대원들에게 적의 최종 고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부대원들이 낮은 언덕을 탈취한 다음 높이 솟아오른 날카로운 등성이를 가로질러 목표물을 향해 나아 가야만 했다고 회상했습니다. 적들은 기관총과 박격포 공격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부대가 전투에 사력을 다해 고지에 어느 정도 가까워 졌을 때 그의 사병들에게 철수명령을 내렸졌습니다. 한 개 보병 중대의 3분의 2밖에 안되는 병력으로 그 고지를 점령하는 것을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화염으로 전투가 잠시 멈추었을 때 로이는 최소한의 사상자로 전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Al Wagstaff중위는엄청난 양의 피를 흘린 뒤 지혈이 어려워 전사 할  수도 있다던 의무병 코플리의 우려에도 불구하고419고지 전투에서의 심각한 무릎 부상으로 부터 살아 남았습니다. 그는  전장에서 환자 수송기에 실려 일본으로 후송되었습니다. 그때의  부상으로 불구가 된Al Wagstaff는 나중에 캐나다로 돌아올 때 전우들을 만나기 위해 벤쿠버에 들렀습니다.  20년도 더 지난 후 선임하사관  로이 러쉬 턴은  오타와의 한 호텔에서 다시 그를 만나게 됩니다. 로이 러쉬턴이 11월 10일 전투 지휘권과 함께 돌려준Al Wagstaff의 지도와 서류들에는 총알 자국이 있었습니다. 오타와에서 도널드 코플리 박사가 Wagstaff'의 이름이 전화번호 부에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Wagstaff은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의무병 코플리는 한국 전쟁 후 의대에 진학해 공부했습니다. 그는 의사로 대학을 졸업하고Rockcliffe RCAF(Royal Canadian Air force) 기지에서  항공의학 경험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의사로서 옛 전우인Al Wagstaff씨를  오타와의 이웃으로 찾아갔습니다. 

 

이등병 도널드 코플리는 그의 용기있는 행동으로 훈장을 받았습니다. 사진에서 그는 10개 소대를 전담하는 보병대대의 의무병입니다. 그는 전투에 0.3구경의 라이플 총을 사용했지만 한 꾸러미의 의약용품 또한 늘 소지하고 있었으며 다른 모든 병사들 처럼 참호속에서 지냈습니다. 그는 신병들과 전우들에게 한국전에 참여하기를 원했지만누군가를 죽이고 싶지는 않아 일선에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기를 원했다고 말했습니다. 캐나다로 돌아온 코플리는 과학 공부를 다시 시작해 대학에 진학하고  의대에서 공부했으며 오랜 시간을 거쳐 의학에 대한 많은 경험을 쌓아왔습니다.

몇 주 뒤에, 다른 중대들로부터 보충된 군인들과 중형 기관총 팀의 합세로 전력이 강화된 D중대는 로이가 전체 중대에 단호한 철수 명령을 내렸던532고지를 공격했습니다. 그 당시 로이는 병장이었습니다. 공격은 눈길을 통해 전선으로 한 시간 가량 행군한 다음 3시간의 등반을 거쳐 적의 사정거리에 들어간 이후 3시간 정도 진행되었습니다. 로이의 부대는 기관총의 화염과 수류탄 폭풍에  힘 입어 고지 위로 진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러차례 총알과 수류탄이 떨어졌음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공격을 가했습니다. 소대장 중의 한 명인 마이키가 그 과정에 부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이 정상에서 200야드 정도 덜어진 곳에 도달했을 때 패트리샤 중대는 지휘관인 존 트럼벨로 부터 지상으로의 후퇴를 명령받았습니다. 병사들은 부상당했고 총알도 고갈된 상황에 적들은 여전히 그들보다 수적으로 우세 했으며 고지 위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이는 자신의 중대가 몇 야드 정도 벙커로 진격했을 뿐이라고 회상했습니다. 로이는 만약 자신이 남아있는 20여명의 군인들을  전부 모아 마지막 공격을 개시 했다면 중대의 절반을 잃었을  것이며 적군은 여전히 아군 위에서 공격을 가했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게다가 밤은 빨리 왔고 그들이 어느 정도 정상까지 도달했다 할 지라도 고지를 사수할  충분한 병력 없이  어둠속에서 거센 공격을 이겨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했습니다. 캐나다 군인들이 한국에서얻어가는 전투 경험과 교훈들은 점점 늘어갔습니다. 적들은 대부분의 고지에 아군보다 몇배는 많은 병력으로 포진되어 있었으며  민첩성이 뛰어나고 유럽에서 온 군인들은 어려워 하는 험난한 산 지형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 날 532고지에서 로이의 중대는 날이 저무는 때를 틈타 전장으로 부터 철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10개 소대는 적과의 접전을 끊고 처음 공격을 시작했던 곳으로 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패트리샤의B중대가 새로운 공격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B중대는 적군이 어둠을 틈타 철수한 덕분에 다음날 아침에 치열한 접전 없이 그 고지를 점령했습니다. 그들은 2명의 포로를 체포하고 40여명의 적군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치열한 전투가 지나간 산 정상 200야드 이상은 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로이 러쉬 턴은 1951년 3월의 532고지 전투 이후 중사로 승진했습니다. 7월에는 소대를 이끌고 임진강을 건너 홍수로 기아에 시달리는 민간인들을 구출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소대는 적진에 방어벽을 구축하고 아군의 교량 건설을 지원했으며 며칠 후 다리가 완성되었을 때에는 그 일대의 모든 적들을 몰아내고 적의 통제하에 있던 민간인들도 구출 할 수 있었습니다. 로이가 그 후 있었던 또 다른 폭격에서 발포소리를 듣지 못함을 알게 되면서 모든 중대의 장교 병사들은 그가 청력을 거의 잃은 상태에서 한국전에 참여해 부대를 이끌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미 로이는 2차 세계대전에서 청력의 대부분을 상실한 상태였고 한국에서  그 상태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훈련능력을 사용해 부대가 11월 캐나다로 돌아오기 전까지 군복무를 계속했습니다.

 

위의 사진은 2003년 7월, 85세의 로이 러쉬 턴이 가평 외곽에 있는 캐나다 참전 군인 기념비에서 연설하고 있는 사진입니다. 이 기념비는 1951년 4월 의 가평 전투 기간 동안 의료지원 현장이 있던 장소에 세워졌습니다.

로이의 아들 로버트 또한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 1981년 프린세스 패트리샤에 입대해 보스니아에서 복무하다가 부상으로  캐나다에 돌아왔습니다.

로이 러쉬턴은 이제 그의 기억 속에서만 한국을 그려보고 어려웠던 시기의 아름다운 도전들과  전장에서 함께 피흘려 싸웠던 용감한 전우들을 그려 볼 뿐 다시 한국 땅을 밟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리더쉽과 훌륭한 태도, 정의를 위한 헌신들은 전선에서 그와 함께 싸운 전우들을 고무 격려 했을 뿐만 아니라 평화의 시기를 살고 있는 캐나다의 국민들에게도 아주 가치있는 것들을  심어주었음이 분명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 정의를 위해 싸웠던  그들을 알고, 세대와 세대를 이어 참전 군인들의 훌륭한 인격과 모범적인 교훈들이 후대들에게 전해지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여기 그 중의 한 명인 노바스코티아 출신의 노병이 조국 캐나다의 건국 150주년을 맞이하며 그의 모든 한국전쟁 참전 전우들에게 행운의 인사를 전하고 있습니다.  5개월 후,  2018년 1월 3일 100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로이에게서 위와  같은 내용의 메시지가 다시 오기를 우리 모두 소망합시다.

*로이는 지금 노바스코 티아Pictou 지방의 Sutherland Harris Memorial Hospital, 222 Haliburton Road, 참전군인 병동에 있습니다. 그에게 인사를 전하고 싶으신 분은 그의 아들 로버트씨의 이메일로 보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