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진


권혁진: It is not Canada or Korea. It is Canada and Korea

 
 

By Hyeuk Jin Kwon (권혁진)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나의 삶이 어떻게 전개 될 지 알 수 없었다. 물론 그 때는 누구도 모르겠지만. 아주 공격적이고 제멋대로였던 나는  학교에서  내가 누구인지 보여주기 위해 거의 모든 학생들에게 싸움을 걸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체벌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저지른 폭력에 대한 대가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성인의 시선으로 본다면,  그 때의 나는 어렸기때문에 어느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나는 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었다.  11살에 브리티쉬 콜럼비아로 이민올 때 나는 이 성격을 그대로 가지고 왔다.   이민은 빠르게 진행되었는데 알고보니 부모님은 이미 모든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부모님은 캐나다 문화를 관찰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줬지만 아무것도 듣지 못한 나는 뭐 잘 되겠지라는 생각만 가지고 있었고 당연히 그럴리는 없었다.

캐나다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어느날, 나는 몇몇 ‘친구들’에게 장난을 치기위해 사물함에서 가위를 몰래 챙겼다. 사실 그 아이들은 친구는 아니었다. 그 아이들은 ESL교실 창문밖에서 나를 놀리곤 했는데 나를 건드린 아이들을 가만 두고싶지는 않았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그 아이들은 단지 자신들과 다른 내 모습이 신기했었던 것 같다. 어쨌든, 그렇게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내 다혈질과 달리 나는 가위를 살짝만 휘두르고 말았다. 심지어 가위 날들은 학생들 쪽이 아니라 거의 아래를 향했었다.  친구들의 놀림에 대한 이 약간의 답례는 교장선생님으로 일말의 고민도 필요없었고 나는 일주일 정학 처벌을 받았다. 그 후 나는 학교의 한국 학생들과도 싸웠는데, 몇 안되는 한국 학생들 사이에서 우위를 정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그 일로 나는 다시 일주일 정학을 당했다.  그동안 우리 부모님들은 무엇을 했는지 궁금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 부모님은 일반적인 좋은 부모님들이 할 수 있는 노력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길때마다 부모님을 원망하고 탓하곤 했다.  그들은나의 변명거리였으며 그렇게 내 잘못을 정당화하곤 했었다. 이런 일들은 내 자존심을 높여줬으나 또한 내게 소외감이라는 감정을 알려줬다.

브리티쉬 컬럼비아에서의 학교 생활, 굳이 말하자면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동안 나는 언어의 장벽에 맞닥뜨렸다. 아주 간단하고 또 그 외의 여러 좋은 이유 들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 아시아인이 아닌 모두를 캐네디언으로 부르고자 한다. 캐네디언들은 아시아인을 경멸하는 말들을 던지고 싶어서 내게 다가와 끊임 없이 말을 시켰다. ‘칭총칭총’ ‘왜 너는 눈이 이렇게 작아?’  ‘중국으로 돌아가’  ‘북한이 우리한테 정말 폭탄을 쏘는거야?   그래, 나도 이 모든 것들이 캐나다 헌법에 나오는 말할 권리와 자유를 잘 못 이해했다는 것 정도는 알아.  그러니까 나는 싸워야 만 해. 그런데 무엇으로 어떻게?  주먹과발로? 나는 이미 이런 폭력들이 캐나다 사회에서 허용 되지 않는 것임을 배워 왔는데? 그럼?  아아 그렇지 말로 싸워야 하는 구나!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 이후영어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나는 고등학교때 시민권을 취득했지만 그 때 까지도그들의 고정관념이나 잘못된 생각에 대해재치있는 반박은  커녕 약간의 복잡한 문장도 영어로 분명하게 표현하기 어려웠다. 비속어나 불완전한 문장들만이 오직 나의 방어 수단 이었다.  ESL선생님들과 과외 선생님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그때까지 나는 한번도 영어에 집중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영어 공부 대신  아시아 인이라는 공통 점을 가진 한국인 친구들이나 다른 아시아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데 더 집중했었다.  보이는 것은 무시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내가 패스트푸드 음식점에 들어갔을 때 계산원들이 바로 눈살을 찌푸리는 것과 같은 것들 말이다.  짧은 대화라도  하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없이 나는 음식 고르기에 몰두하고  더듬거리며 주문을 하고 이내 포장된 음식 꾸러미를 들고 밖으로 나온다. 겉으로 보기에 특별할 것 없는이 과정은 때때로 날 힘들고 슬프게 만들었다. 언어라는  요새는 점점 더 난공불락이되어갔고 함부로 다가설 수 없는 것이 되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일 매일똑같은 사람들과, 똑같은 단어, 똑같은 문화 그리고 똑같은 태도와 정체성보내며 지냈다. 하지만 나는단조로움 속에서 최소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나는 욕과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언어능력으로는 수업을 이해하는데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든 강의들이 상급 영어로 진행되었고 시험 전날에나 벼락치기를 하던 나로서는 도저히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없었다. 나의 성적은 엄청나게 떨어졌으며 그건 변화가 필요하다는 분명한 증거를 보여주고 있었다.  언어학자들은 사람이 일정한  나이가 지나면 정말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 이상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는 일은 극도로 어려운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했냐고? 나는 정말 진심으로 영어를 배우기 위해 노력했다. 당연히 그 배움의 과정에는 수많은 성공과 실패가 있었지만 나는 대학에서 살아남아야 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스스로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캐나다 사람들을 타인으로 분리해 버리는 대신 캐나다인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려 했다면,  가위를 휘두르는 것이 캐나다 학생들을 곧바로 교장실로 달려가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떤 것들이 이곳에서 허용되고 그렇지 않은지를 알았더라면, 만약 내가 두개의 공식언어중 최소한 하나라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만약 내가, 만약에 내가  … 라는 생각들을.

안내서, 나에게는 안내서가 필요했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모든 선택들에 책임을 져야 한다. 나는 캐나다에서 10년동안 살았지만 아직도 영어를 잘 못하는 두명의 한국 친구가 있다. 또한  나는 영어로 말하거나 쓰는 것이 어려워 캐나다의 정체성에 융화되기 어려워 하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한국인으로만 국한시키는 몇명의 고등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이들은 예외적인 경우이다. 몇몇의 한국 이민자들은 성공적으로 해외에 정착할 뿐 아니라 심지어 학교와 동아리에서 리더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높은 성취를 이룬 몇몇의 사람들을 보면서 젊은 이민자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다양성은 캐나다의 정체성중 하나로 여겨져왔다. 하지만 우리는 이 훌륭한 정체성을 섣불리자랑하는 것 또한 조심해야 한다. 다양성을 단순히 인종과 민족의 다름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위험하며 오히려 분열을 초래하는 시각이라고 본다. 중요한 것은 다양성이란 새롭고 젊은 이민자들이  그들의  모국에서 부터 이미 형성해 온 정체성 또한 아우르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의  마음을 열고 캐나다에 동화 되도록 도우며 이곳의 언어 또한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전환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진정한 다양성이며 알맞은 안내서를 그들에게 제공할 때 이루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