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욤 패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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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욤 패트리는 비정상 회담이라는 한국 방송에 출연하여 한국 대중에 널리 알려진 캐나다계 한국 방송인입니다. 다양한 문화들 간의 문화적인 차이를 나누고 토론하는 자리인 비정상회담 프로그램에서 기욤은 캐나다를 대변하는 목소리이지요. 또한 기욤은 한카 150주년을 대표하는 두명의 홍보대사중 한명이기도 합니다.


짧게 자기소개를 한다면?

제 이름은 기욤 패트리입니다. 저는 퀘벡 시에서 태어났어요. 1998년 말쯤에 스타크래프트 게임이 막 출시되었을 때부터 그 게임에 몰두하기 시작했는데, 스타크래프트는 처음에 한국에서보다 북미와 유럽에서 인기가 많았어서 처음에는 북미와 유럽에서 개최되는 대회에 참가하곤 했었어요. 그런데 1999년 말에 한국에서 스타크래프트가 크게 인기 몰이하면서 대회들이 방송을 타기 시작했어요. 용돈도 벌 겸 여행도 할 겸 저는 3개월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대회에 출전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제가 방송을 탄 한 대회에서 덜커덕 우승을 하는 바람에 한국에 대중분들과 후원사들이 저를 알아보게 되었어요. 너무나 재미있었어요. 처음에 “3개월정도만” 이라고 생각했던 한국에서의 체류가 어느덧 18년이 되어버렸네요. 한국에서 사는 것이 아직도 참 좋습니다.


처음의 한국에 대한 인상은 어땠나요?

처음에 한국에 도착했을 때, 저는 버스 타는 법도 몰랐어요. 그 당시엔 아직 인천공항이 없을 때여서, 처음에 김포공항에 내려서 잠실까지 택시를 탔는데, 택시비가20,000 원 나왔어요 (캐나다 달러 $22정도). 값이 너무 저렴해서 믿을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먼 거리를 차를 타고 왔는데, 그정도 밖에 안되는 것이 믿을 수가 없어서 택시 기사랑 옥신각신 했던 게 생각나네요.

 

“스타크래프트를 할 때 모니터에 한글이 다 깨져서 나오곤 했는데, 저는 감쪽같이 그게 한글이라고 믿고 있었어요.”


기억에 남는 추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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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한 친구를 “실기 피씨방”이라는 곳에서 만났어야 했는데, 그날따라 정말 후덥지근하게 더운 날이었어요. 저보다 아마 5-6살쯤 많은 학생한테 실기 피씨방을 찼는 걸 도와달라고 했는데, 그 학생이 우연히도 연세대 앞에 있는 실기 피씨방을 알고 있었어요. 저는 여전히 제가 어디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는데, 손수15분을 저와 걸으면서 길을 가르쳐 준 그 분의 호의를 여전히 잊을 수가 없어요. 모르는 사람에게 그런 정성으로 선의를 베푸는 그분에게 너무 감사했어요. 제가 다른 곳에 있었더라면 그 정도의 호의는 불가능했을거라고 생각해요.


한국에 오기 전에 한국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있엇나요?

전혀 몰랐어요. 삼성, LG, 기아 같은 브랜드는 알고 있었지만, 한국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었어요. 제가 아버지께 한국에 가겠다고 했을 때, 제가 번돈으로 한국 가는 걸 막지는 않으셨지만, 저랑 여행사에 같이 갔을 때 여행사 직원조차 한국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던 때니까요.
 

한국에 오기전에 한국말을 할 수 있었나요?

저는 스타크래프트를 한국 사람과 하고 있을 때, 한글 글자들이 모니터에 다 깨져서 나왔는데, 저는 그게 한국말인줄 알았어요. 글씨들이 다 깨져서 여러 문자들이랑 섞여서 나왔는데, 저는 그게 한글인 줄 알고, “참 웃기게 생겼다”라고 생각을 했었어요. 어느날 캐나다에 있는 제 친구 한명이 “이 바보야. 그거 한국말 아니야.” 라고 가르쳐주어서, 그제서야 저는 깨닫게 되었고 인터넷에서 찾아보고서 한글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게 되었답니다.

“우선 먼저 “안녕”이라고 어색함을 깨면 한국사람들은 정말 서로에게 잘하고 관심을 보여줍니다.”


한국어를 어떻게 배우셨나요?

처음에 한국에 왔을때 뉴질랜드 대사관에서 일하고 있던 존 라일리 (John Riley)라는 친구를 알게 되었는데, 그 친구는 1997년에 한국어를 배웠다고 했어요. 우리가 같이 어울려 다닐 때 그 친구는 길을 걸을때마다 한국어 단어를 하나하나 읽어주면서 제가 단어들을 잘 발음할 수 있도록 꼬박꼬박 가르쳐 주었답니다. 그리고선 이대 언어학당을 다니면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 당시에는 한국어 학당이 그다지 붐비지 않았지만, 요새는 학생들로 꽉 차있죠. 저는 학생으로서는 그다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지만, 한국에서 오래 살면서 조금씩 실력이 늘었다고 생각해요.


한국문화중 가장 즐기는 부분이나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한국에서 가장 어려운 건 처음 어색함을 깨는 거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운전을 하는 중 차선을 바꾸려고 한다면, 깜박이를 켜도 옆 차가 자리를 내주지 않아요. 그렇지만 창문을 내리고 손 내밀면 옆차가 자리를 뇌어주지요. 그것처럼 한국에서는 처음 어색함을 깨고 “안녕” 이라고 시도를 하면, 사람들이 너무나 잘해주고 관심을 보여줍니다. 한국문화의 독특한 점은, 먼저 다가가면 사람들이 앞장서서 수고를 마다않고 도와주려고 한다는 것이에요.

캐나다와 비교해서 한국문화의 특이한 점은 나이의 역할이에요. 예를 들어 누군가가 나보다 나이가 많으면 그에대한 예의를 표현해야 해요. 반대로 누군가 나보다 나이가 어리면 더욱더 따듯하게 잘 해줘야 한다는 것이죠. 저보다 어린 사람이니까. 굳이 롤모델이라고까지 하긴 어렵지만, 한국문화에서는 다른사람들을 대할 때 나이에 맞게 존경을 받을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해요. 또한 나이가 비슷한 경우엔 몇시간 만에 금방 절친이 될 수 있다는 것도 특히 신비롭고 좋은 점이라고 생각해요.

 

“제 스스로를 이중문화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뿌듯합니다.”

 

한국에서의 경험을 요약한다면?

저의 한국에서의 경험을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모든 사람이 이중(다중)문화인이 되보려고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한 곳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자라면 다른 세계사람들의 관점을 경험하기 어렵지요. 그렇게만 살기엔 아쉽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한곳에서만 한 문화만 알다보면 스스로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주어진 문화와 고정관념을 그대로 이어받기만 하는 것 같아요. 저는 제가 깨닫게 된 문화, 관념, 관습들이 제 부모님이나 북미를 벗어나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생소한 것일 거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에 살면서 제 스스로를 이중(다중)문화인이라고 지칭할수 있어서 뿌듯합니다. 저는 제 자손에게도 이중(다중)문화를 꼭 전해주고 싶어요. 그래서 저에게는 이중(다중)문화를 경험하고 이중(다중)문화인이 되는 것이 아주 중요한 가치입니다. 그게 제가 한국에서 살면서 배운 가장 큰 교육이라고 생각해요.

 

“한국 사람들은 이미 캐나다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어요.”

 

캐나다 수교 150주년 명예홍보대사로서의 역할을 설명한다면?

한국인들에게 외국에 대한 호감도를 조사했을 때 캐나다가 1위였다고 들었어요. 그런면에서 저의 캐나다 수교 홍보대사의 역할이 다른 나라 홍보대사역할보다 쉽다고 생각해요. 게다가 대부분 한국사람들은 캐나다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고 있답니다. 흔한 이미지로는 은퇴해서 캐나다에서 안전하고 여유있게 살고 싶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지요. 제 개인적인 의견으론 캐나다는 소수민족이 살기 좋은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한국분들이 자녀들을 캐나다로 유학보내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게다가 비정상회담 프로그램에서 저는 제 앞에 큰 캐나다 국기를 세워놨는데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금방 제가 캐나다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요. 한국 분들이 제 얼굴을 알다보니 캐나다에 대해서도 쉽게 호감을 갖는 것 같아요. 한국 분들이 저보고 “캐나다 음식은 뭐예요?”라고 물으면, 저는 “캐나다는 이태리, 프랑스, 한국, 중국과 같은 역사가 없다보니 독특한 음식은 좀 부족하다”고 대답해요. 대신 진보적인 아이디어를 국정에 잘 반영하는 선진국으로서의 모범을 보이는 것이 캐나다의 큰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한국에 오고자하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우선 한국을 방문해서 경험해 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그리고 한국이 좋으면 한국으로 이주를 할 수도 있지요. 저는 제가 어렸을 때 그저 부모님이 권하는 대로 따라 한 것 같아요. 여름에는 골프, 겨울에는 스키. 그렇지만 저는 골프도 싫어했고 스키도 그저 그랬어요. 제가 정말 좋아하고 잘하는 것은 스타크래프트 게임이었어요. 그 꿈을 따라서 오다보니 한국에 오게 되었어요. 저로서는 한국에 오는 것이 제 생애 가장 잘 결정한 결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가장 후회되는 것은 처음에 오자마자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다는 것이에요. 앞으로 한국에 오고자 하는 분들께 저는 한국어를 배우는데 투자하라고 권하고 싶어요. 설사 한국에 머물고자 하는게 단기 몇년간이라도, 매일 몇 시간 정도를 할애해서 한국어를 배우는 것은 절대 후회하지 않을 투자라고 확신합니다. 본국에 돌아가게 되더라고 한국어를 배운것이 절대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라고 믿어요.

또한 남들이 하라는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고 권하고 싶어요. 부모님이나 주변의 사람들이 완벽한 길을 앞에 놓아주고 권하더라도, 그 길이 모든사람에게 맞는 건 아니잖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제가 흥미가 없으면 정말 잘하기 힘들어요. 저의 부모님이 권한 길은 정말 저에게는 맞지 않는 길이었어요. 이제 우리는 세계가 가까이 연결된 글로벌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뭔가에 특출할 수 있다면 저는 그 꿈에 매진해 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그게 그림이 되었던, 춤이 되었던, 연기가 되었던 간에 말이죠. 아니면 프로 게이밍. 프로 게이머는 제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이름도 존재하지 않았던 직종이었어요. 저는 그저 “대회나 몇 번 출전해봐야지” 라고 생각했었지요. 그러다가 사람들이 제가 하는 걸 “프로 게이밍”이라고 부르더라고요. 그러다 생각해 보니 “전직으로 게임을 하는 데다가 후원사도 있으니 프로 게이머네! 흠 꽤 멋있는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사람들은 저희를 프로 게이머의 첫 세대라고 부르곤 한답니다. 저희들 전에는 그런 직종도 없었고, 저희가 나가는 대회들이 TV에 방송되지도 않았어요.

 

문화적인 어려움에 대해서 말하자면?

한국에서 산 지 약 1년 반 쯤 되었을때, 저는 한국에서는 나이가 어린 사람이 먼저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 전에 사람들이 저를 무서워하거나 저를 좀 거만해 보인다고 들었어요.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이유을 도대체 이유를 알 수가 없었어요. 어느날 친구가 말해주더라고요. “한국에서는 나이가 어린 사람이 먼저 인사해야하는 거 알지?” 아니, 저는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캐나다에서는 그런 관습이 없었거든요. 그때서야 알게 되었죠. 아, 내가 지난 1년 반 동안 무례해서 그랬었구나. 한편으로는 ‘단순히 어리다고 해서 왜 먼저 인사를 해야 하는거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 때 이후로는 항상 먼저 인사를 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저는 꿈을 쫒았고, 그리하여 한국에 오게 되었어요. 그게 제 인생에서 제일 잘 내린 선택이었어요.”

 

앞으로의 비전은?

지난 3년동안 비정상 회담 프로그램을 해왔는데, 이제 조금 지치는 것 같아요. 방송하는 것도 재미있고 멋있는 분들을 만날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하지만 방송국에서 다른 캐나다인을 찾았다고 한다면, 저는 그 일을 쉬고 여행을 좀 하고 싶어요. 1년정도 계약이 남았는데, 방송계약이 끝나고 나면 그 전에 하던 걸 할 까 해요. 그 전에 하던 일은 포커를 하는 거예요. 아직은 저를 스폰서하는 카지노가 없지만, 포커를 하면서 여행을 할 수 가 있어요. 포커는 스트레스가 덜하고 재미있어요.


프로 게이머는 스트레스가 많나요?

네, 그리고 아주 경쟁이 치열하지요. 게이머는 수두룩한데 세계 20위 정도에는 들어야 하니 경쟁이 너무나 치열할 수 밖에 없지요. 정상으로 올라가는 비율이 아주 낮아요. 이에 비해서 포커는 다르죠. 10명이랑 같이 게임을 하더라도 일부는 포커를 전혀 모르는 경우가 흔하니까. 그저 커피 시켜놓고 즐기면 되요. 스트레스가 적죠.


이기고 지는 것에 크게 연연하지 않나요?

단기적으로는 신경 안쓰는 편이에요. 그렇지만 6개월을 연속으로 진다면, 제 실력이 별로인가보다 하겠지만, 아직은 한번도 일어난 적은 없어요. 지난 10년간 하던 일이니까요. 저는 2003년에 스타 크래프트를 은퇴한 후 포커를 시작해서 2014/2015년까지 하다가 최근에는 그것도 쉬게 되었어요.

 

Written by Paul Chun, Jina Ko and Caleb 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