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악


화악: 내가  선택한 나라와 나의 고향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36년을 살았다. 그 후 1971년 캐나다로 이민을 오고  46년 째 이 곳 캐나다에 머물고 있다. 65살이 되기 전까지는 캐나다 연방 정부 회계 감사관, 공인 회계사, 대학 강사로 아주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세명의 자녀를 두었다: 신경 외과 의사인 첫째와 컴퓨터 전문가인 둘째는 아들이고, 학교 선생님인 막내는 딸이다. 현재의 나는 행복하게 은퇴하고 사랑스러운 아내와 여생을 즐기고 있다.

캐나다는 정말 훌륭한 나라이며 이곳에 살 수 있음에 행복하지만 그럼에서 불구하고 나의 마음은 항상 한반도를 배회한다. 하루에 세 번 씩 한국 뉴스를 보고, 한국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을 걱정한다. 한국인들은 열심히 일하고 믿을 수 없이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루었지만 나라 자체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그 곳에는 여전히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나라들의 지정학적 상황으로 엄청난 위험들이 남아있다.

내가 선택한 나라 캐나다는 한국을 포함하는 세계의 많은 나라들을 돕고 있는 좋은 국가이다. 이 씨 왕조가 한국을 지배하던 조선시대(1880-1910)에  캐나다는 몇 백명의 선교사들을 한국으로 파견했다. 그들은 기독교의 교리만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의학에 대한 지식도 나누었으며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던 시기에는 우리의 독립을 돕기도 했다. 아래에 소개할 사람들은 한국의 미래를 변화시키는 영향력 있는 삶을 산 소수의 선구자들이었다.

James Scarth Gale (1863-1937)는 1888년 12월 12일 캐나다의 첫 선교사로 한국에 파견되었다. 그의 존재는 한국과 캐나다 관계의 시작을 그었다.  그는 신약성경;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을 한국어로 번역했으며 한영사전을 출판했다. 그는 또 춘향전이나 구운몽과 같은 한국의 전통소설도 영어로 번역했으며, 존 버니안이 쓴 소설 ‘천로역정’을 한국어로 번역한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중신 여자 고등학교‘ 와 ‘경신 남자 고등학교’ 를 세우고  ‘운당 교회’도 설립했다.

Oliver R. Avison (1860-1956) 는 한국 서양 의학과 의학 교육의 아버지이다. 그는 조선의 황제 고종의 개인 의사로 일하면서 50년을 한국에서 헌신했다. 또 미국의Cleveland에서 온 백만장자 Louis H. Severance의 지원으로 한국에 첫 서양 식 병원을 설립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 병원은 나중에 연세대학교 의학대학으로 발전했다.

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는 뉴욕에서 태어나 캐네디언 선교사Rev. William James Hall, MD 와 결혼했다. 애석하게도 그녀의 남편은 한국인 환자들을 치료하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이것이 그녀를 멈추게 하지는 않았으며 그녀는 44년을 한국 장애인 교육 자원의 발전을 돕는데 할애했다. 그녀는 나중에 고려대학교 의학대학으로 발전한  ‘조선 여자 의과 대학’의 설립자이다. 아들Dr. Sherwood Hall, MD와 함께 한반도에서 폐결핵을 근절하는데에도 기여했다.

Francis Schofield (1889-1970)는 1919년의 대한민국 독립운동에 기여한 캐네디언이다. 중요하게는, 일본지배 하의 한국시민들에게 오는 부당함을 밝히는데 힘썼다고 한다. 프랜시스는 존경받는 독립 운동가였다. 그래서 1970년 세상을 떠났을 때 서울에 있는 한국 국립 묘지에 묻혔다.

William John Mackenzie (1861-1895)는 1893년 한국에 도착했다. 그는 한국의 모든 것을 받아들인 사람이었다. 한국인의 옷을 입고, 한국 음식을 먹고 오래된 한옥에서 살았다. 기독교의 교리를 전파하는데 아주 열정적이었으며 한국에 첫 개신교 교회를 건립했다. 그는 믿음을 나누는 것에 모든 것을 바치다 1895년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  

Robert Hardie (1865-1949)는 한국에 기독교를 전파한 유명한 전도사이다.  20세기 초 한국에서 일어난 ‘대 부흥 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캐네디언 선교사들이 그들의 믿음을 한국에 전파하기 위해 스스로의 삶을 바쳤다. 그들 모두를 기념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이 소수의 사람들이라도 그들이 한 신앙과 의학, 공동체 안에서의 거대한 기여에 대해 짧게 소개되기를 바란다.  지금의 한국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나라들을 도울 수 있는 자랑스러운 국가이다. 오늘 날 기독교 신앙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하며 세계에서 두번 째로 많은 선교사들을 파견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한국과 캐나다의 관계에 있어서 근대와 과거를 이어주는 하나의 중요한 축이 되었던 순간인 한국 전쟁 당시의 가평 전투를 놓치고 싶지 않다.

가평 전투는 1951년 4월 23일 시작되어 이 틀 동안 진행되었다. 가평은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에서 대략 60 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전쟁이 진행 되는 동안 후퇴하던 중공군이 다시 연합하여 믿을 수 없이 강한 힘으로 유엔군을 역공했다. 중공군의 병력은 유엔군의 5배를 넘었다. 만약 이 공격이 성공적이었다면, 중공군은 한국군 6사단을 전멸시키고 서울을 장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 전쟁에 있어서 그 시점은 중공군을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던 굉장히 어두운 시간이었다.

밤의 어둠 속에서,  프린세스 패트리샤 캐네디언 경보병대 2대대가 전방 부대에 보충되었다. 이 부대와 동행하는 병력은 뉴질랜드 보평연대에 의해 지원된 오스트랄리안 병력이었다. 부대는 영국군 27여단에 배속되어 가평 계곡 길로 들어가는 중공군의 진격을 막는 임무를 맡았다. 몇시간 안에, 그들은 자신들의 방어라인에 자리잡고 그 날 밤부터 다음 날 까지 격전을 벌렸다.  전장에 있던  엄청난 중국 병사들에도 불구하고, 캐나다 군과  다른 유엔군 병사들은 중공군 부대를 격파시키면서 승리의 사기를 올렸다. 이것은 서울이 중공군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것을 막은 중요한 순간이었다. 이 승리는 상징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전쟁의 승리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이 하나의 전투에서 캐나다 군은 10명의 사상자와 23명의 부상자를 냈다. 한국 전쟁에서 중요했던 이 순간을 기념하고 캐나다 병사들에게 감사함을 표하기 위해 “가평 캐나다 전투 기념비”가 대한민국 경기도 가평에 세워졌다.  한국은 한국인의 자유를 위해 싸운 캐나다 군인들에게 영원한 감사함을 가지고 있다. 유엔군에 배속되어 한국 전쟁에서 싸운 16개의 나라 중에서, 캐나다는 3번째로 큰 기여를 한 유엔군 파견 부대였다. 도합 26,791명의 참전 군인 중에서 516명이 목숨을 잃고 1200명 이상의 군인들이 부상을 입었다.

오늘 날의 캐나다에서 나의 삶을 바라보면 자식들과 그 후손들이 이 훌륭한 나라에 살 것이라는 것이 정말 기쁘다. 그들은 이 자유롭고, 평화로우며 번영하는 나라에서 세대와 세대를 이어 행복하게 살 것이다.  캐나다는 풍부한 지하자원이 있고 세계 많은 나라들을 돕는 아름다운 나라이다.

동시에, 내 고향 한국 또한 절대 잊을 수 없다. 내가 태어난 곳에는 작은 농장 마을이 있었다. 거의 매일 오르던 친근한 동산들이 마을의 뒤로 놓여있고 늦가을의 황금빛 논들이 그 앞으로 펼쳐져 있었다.  마을에서4Km 떨어진 곳에 있는 학교에 친구들과 웃고 노래하면서 다녔었다. 여름이면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으면 어머니가 그것으로 맛있는 탕을 끓여 주었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는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었었다. 나는 아직도 전화나 인터넷을 통해 정상적으로 연락을 주고 받는 가까운 친구들과 형제들로 인해 한국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한국과 캐나다, 두 나라 모두 내가 항상 평화와 자유, 번영을 위해 기도하는 나라들이다.  한국이 최근들어 국내 외적으로 어려운 상황들에 직면하는 반면 캐나다는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캐나다와 한국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2017. 4.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