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영


김태영: 6.25 한국전쟁과 내가 복무하던 육군특무부대


ROK ARMY C. I. C. (Counter Intelligence Corp)   

나는 1930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대학교에 다닐때까지 서울에서 살고있었다. 1945년 8얼15일 일본식민지로 부터 해방되던날 까지 서울에서 일본인 학교 교육을 받었다. 세계 제2차 대전에서 미국을 중심으로한 연합군의 승리로 한반도는 일본인 정치에서 해방돼여 독립국가가돼었으나 한반도는 38도선을 중심으로 남과북으로 나누어저 두개의 나라가 되었고 1948년에 남쪽은 대한민국으로 민주주의 정부가 수립 되었다.

그러나 북한은 사상과이념이다른 공산주의 국가로서 불법남침으로 통일 하고저 마침내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에 선전포고 없이 남침을 감행함으로 6.25 전쟁이 시작 되었다. 다음날 26일 아침 나는 학교에 가려고 거리로 나아가니 서울거리에는 경찰과 군인들이 거리에 시민들을 통제하면서 각자 자기집으로 돌아가라는 방송을 하면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나는 학교로가다가 멈추고 집으로 돌아와 부모님에게 소식을 전하고 피난을 가야할 준비를 하였다. 당시 서울 인구는 약 백만 정도인데 서울시에서 남쪽으로 걸어서 빠저 나가려면 상당한시간이 필요하며 또한 서울에서 남하 하려면 한강을 건너야 하는데 단 하나의 한강 인도교를 건너야한다. 그러나 6월27일 서울에 중앙정부는 남하 하여 대전시로 이동 하였고 그당시 한국군 사령부의 작전상 한강인도교 마저 폭파시킴으로 대부분의 서울 시민들은 남하 하지 못하게 되었다.

남침후 3일 되던 6월28일 에는 북한공산군은 서울시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당시 서울 시민중에 공산주의 종북좌파들은 각 구역별로 치안대를 조직하여 각 동내에 거주하는 시민들 중에 부자, 크게 사업하는자, 정부 공무웡가족, 경찰 가족, 군인가족들을 색출하여 거리에서 인민 재판식으로 공개 처형 하는등 세계2차대전 당시 독일에서 유대인들을 대학살 시켰던 거와 같이 잔인하게 만행을 저질렀다. 나는 그당시 이 사실을 직접 목격하였으며 다행히 나의 부모는 부자도 않이고 공직자도 않이고 하여 무사 했으나 나는 숨어서 사는 공포 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생활을 약 3개월 할때 드디어 9월 28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육작전의 반격으로 서울시가 다시 탈환되여 우리국군이 서울에 들어와 치안을 유지하게 되었다.

맥아더 장군의 지휘하에 UN군이계속 북진하여 북한의 수도인 평양을 점령하고 중국과의 국경인 압록강까지 진격하던중 중공군 수백만 대군의 반격으로 우리 UN군은후퇴 할수밖에 없었다. 중공군과 북한군은 계속 남하하여 또다시 서울시를 장악하게 되었다. 1951년, 1월4일 그때 나는 나의 고모님이 사시는 대구시로 내려갔다. 그때 내 나이 21세로서 군에 입대 해야만 함으로 그 당시에 불었던  전시육군종합학교에 입학하며 수개월간의 단기군사 교육을 마치고 장교로 임관후 중부선선최전방에 위치하고 있는 육군제8사단 사령부 G-2 정보처로 부임하게되여 정보 및 작전상황실에서 복무 하였다.

1955년 11 월 CIC 대원들 과 함께

1955년 11 월 CIC 대원들 과 함께

1953 년 5월 당시 군고위층의 주선으로 육군특무부대(ROK CIC) 로 전속명령을받앋다.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Armistice Agreement)으로 남북전쟁은 휴전되었다. 나는 C.I.C로 부임한후 소정의 CIC대원교육을 받은후 서울지구506 CIC부대에서 근무하게되었다. .그때 나의 임무는조사과에서 서울지구주둔 부대원들에 관한 신원과 배경을 조사 작성하는 것이었다.  특별히 나의 담당임무는 육군본부(R.O.K  HQ)내각부처 고급장교(영관급이상)들의 신원조사작성 하는것 이다.  1956년10월 갑자기 사건이 발생 하였다.  

그당시 나는 부대일직사관근무(Day duty officer) 를 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부대하사관들과 같이 부대현관앞에서 C.I.C부대장(김창룡 중장)이 출근 하는것을 대기 하고있을때 긴급소식에 의하면 부대장이 아침 출근 도중 노상에서 자기승용차 안에서 암살을 당했다는겄이다.  그때문에 전부대에 비상사태로 모든 업무가 중지되었다. 이사건은 북한 간첩의 소행이 아니고 우리 군내부 고위층의 C.I.C부대장에 대한 반감과 원한을 품고 있던자의 소행으로 수사가 종결되었다. 그리고 그암살자들의 배후일당은 모두체포되었고 군법회의에서 처형 되었다. 그당시 육군특무부대의 임무는 간첩을 색출하여 체포 하는데 있지만 이와관련해서 군부고위층들의 부정부패도 색출하고 정부공직자나 정치인들 까지 비밀내사하여 상부(대통령)에게 까지보고 하도록 되여 있었다.  

즉 군 내부는 물론 민간인들 까지 수사하여  종북좌파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자들을 색출하는수사 기관 이었다.  1959년10월 나는 가정사정으로 자원하여 군에서 육군대위로 전역 하였다.   그후 나는 나의 장인이 경영하는 회사에서 근무하다가  1970년 3월에 가족과 함께 이곳 CANADA로 이민을 오게되었다.  지금까지 47년간이곳 VANCOUVER에서 이민생활을 하면서 항상 느끼고 있는것은 이 CANADA라는 나라는 특히 후생과 사회복지제도가  잘돼있고 이러한 참된 자유민주주의국가에 살고있게 된것에  항상 감사하며 행복 하게 살고있다.  지금우리조국 대한민국응 6,25 전쟁후 67년간의 오랜세월이 지났지만 남북이 통일되지 못하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북한에서는 남한을 적화통일만을 위하여 남한에 있는 종북좌파세력들은 언론,정치,법조계까지 침투하여 활동 하고 있으며 또한 북한에서는 수십년간 핵무기와  미사일을 만들어 남한은 물론 미국본토까지 공격위협을 가하고 있는 실정으로 지금은 한반도의 위험긴장이 최고조로 되고 있는데  지금 우리나라 젊은사람들(6,25 전쟁경험이없는) 의 안보 불감증은 매우심각하며 심히우려스럽다. 6,25전쟁을 직접 목격 경험한 우리참전용사(6,25 War Veteran)들은 더욱 철저한 안보의식을 가지며 특별히 우리나라는 안보가 무너지면 국가도 국민도 없다는 이념으로 우리후손들 에게까지 잘알려 주도록  노력해야 할것이다.

김  태  영       씀 (Kim Tae Y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