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우


정용우 : 나의 살아온 이야기


1.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서

나는 1931년 10월 11일 평안북도 철산에서 부친 정상화, 모친 장영화의 3남3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초등학교 시절 잊지 못할 일은 창씨개명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우리의 성명을 일본식 이름으로 강제 변경시킨 일)과, 우리말을 쓰지 못하게 하고, 일본어 사용을 강조해 친구들과 우리말을 했다고 벌을 받은 사실도 있었다. 2차대전시 군수품으로 쓰기 위해 나의 밥그릇인 놋그릇도 빼앗아 갔다.

그리고 요즘 한일간의 현안으로 되어있는 위안부문제, 제가 어렸을 때 동네 누나들 일본군에 끌려간다고 결혼을 일찍 하는 것도 보았고 실제로 강제로 끌려가 본인은 물론,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할 뿐 아니라 동네 어르신들의 분노를 자아내게 했다.

이로 보건대, 늦으나마 이제라도 일본은 사죄하고 양국관계를 정상화해야 할 것이다. 특히 저희 가정의 경우 형님이 일본군에 끌려갈 날이 가까워 부모님이 전전긍긍하시던 모습을 보았다. 이와 같이 일제하의 생활은 자유와 재산 그리고 생명까지도 강탈당한 고난의 암흑 시절이었다.

이렇게 피압박민족으로서 수탈 당하는 참으로 고뇌에 찬 나날을 한숨지으며 당하고만 있던 중, 천우신조로 1945년 8월 15일 미국을 위시한 연합군의 승리로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되었다. 이 광복의 날을 맞아, 온 국민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기뻐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2. 북한공산당 치하에서

해방의 감격과 기쁨도 잠시였다. 38선 이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해 약탈과 강간등 온갖 횡포로 공포분위기에 쌓여 불안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소련의 앞잡이 김일성일당 즉 북한 공상당의 잔학한 통치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즉 출신성분을 구분하여 성분별로 주민을 갈라놓아 서로 반목질시의 관계를 조성하고 있는 공산당 치하의 생활은 지긋지긋했다.

그 실례를 들자면
 

(1). 소위 토지개혁이 아닌 토지개악을 들 수 있다.

지주의 토지와 가옥을 무상으로 빼앗아 소위 소작인(일 싫어하는 자)에게 분배한 공산당정책: 지주는 노동의 대가로 얻은 토지소유자(혹 불노소득자도 있을 것임)인데 그 수고는 깡그리 묵살하고 옥석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지주라고 빼앗고 내쫓는 것은 크게 잘못된 정책이었다. 저의 부모의 경우 밤낮 가리지 않고 논밭을 가꾸었고 겨울에도 쉼 없이 밤에는 가마니를 짜시고, 낮에는 심어놓은 농작물을 돌아보느라 손가락이 툭툭 갈라져 밥풀을 바르고 헝겊으로 동여매고서도 직접 일하신 분, 안 먹고 안 쓰고 아끼고 아껴 한마지기, 두마지기씩 사들여 아버지 어머니 두 분이 힘에 겨워 일손을 구해 (소작) 농사일을 꾸려 나가셨던 참 농부 그 분을 내쫓다니! 부모님 일 하실 때는 그들은 술을 마시고, 투전이나 하던 자들이 농번기 우리 논밭에서 일 하고 먹고 살았던 자들이 공산화 되니 소작 신분이 자기 세상이 되었다고 논밭을 빼앗고 집까지 차지하고 축출 명령을 뻔뻔스럽게 내리니 아버님 어머님 기가 막혀 눈물만 흘리던 모습, 눈에 선하다. 이것이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다는 공산사회가 이런 것이다.
 

(2). 중학교 학생시절에 겪었던 기억

친구끼리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서 놀면서 둘이 이야기를 했다고 교직원회의에서 문제가 되어 특별 감시 명령이 내려져 눈총을 받고 있었으니 이것이 공산당 치하의 학교생활, 한심하지요. (이때뿐 아니라 평소에도 제 신분이 지주의 아들이고, 크리스챤 자식이라고 요주의 학생이었고, 저희에게 둘이 만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해준 선생은 평소 저희를 아끼는 선생이었음).
 

(3). 정치 보위부 출두경험

중학교 2학년 때 일요일 교회(그때는 교회가 있었음)에 갔다 오다가 과수원에 떨어지는 삐라를 주워 동회에 갖다 주었는데. 군 정치 보위부에서 호출명령이 내려 출두해 혼이 난일. 애를 그렇게 취급하다니,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공산당이 싫게 만들었다.
 

(4). 일요일 학교에 안가고 교회가면 퇴교

특별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교회 가지 말고 반드시 학교에 와야 한다고, 등교를 안 하고 교회 가면 퇴교시킨다고, 그들의 헌법에는 신앙의 자유가 있다고 명시 해 놓고 (이것은 대외용) 심지어 자아비판까지 하라고 하니 공산당 참 싫었다.
 

(5). 평양에 강제이주

축출 (정배) 명령에는 평북 산악지대인 희천 지방인데 아무도 아는 이 없어 아버님이 당 간부에게 양해를 구해 지정 지역은 안가고 이모님 댁이 있는 평양으로 보내달라고 하니 평소 존경 받는 어르신이라 아버님 청을 물리치지 못하고 그렇게 하라고 해서 이모님 댁으로 강제이주 되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나온 형편이라 이제는 의식주가 문제가 되었다. 저도 중학생이지만 과일 노점상을 해 보라고 사과를 사 주셔서 그것을 가지고 거리에 앉았는데 “사과 사시요” 라는 말이 안 나와 가만히 앉아서 불쌍한 사람이 와서 사과하나 달라고 하면 그대로 쥐어주곤 하면서 팔기는커녕 빈손으로 집에 돌아왔다. 어머니는 저를 보시고 네가 무슨 장사를 하겠느냐며 책이나 보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이모 집에서 몇 개월 지내는중에 고향 본교에서 학생들은 와서 공부하라고 연락이 와 고향 형님 집에서 학교를 계속 다니게 되었다. 이 때 부모님은 월남하실 기회가 있었지만 막내인 저 때문에 남하를 못하시고 6.25 발발 후 아버지는 숨어 계시다가 부산으로 피난 오셨지만, 어머니는 길이 막혀 결국 저 때문에 홀로 그곳에서 고생하신 것 생각하니 참 불효자가 되었다.
 

(6). 아버지에게는 체포령이 내렸다

내 쫓은 것도 모자라 결국 6.25 직전에 공산당에서 아버님을 잡아 드리라는 명령을 먼저 전해 들어 (아버님 존경하는 소작인, 공산당 간부로 부터) 아버님은 숨어 지내시다 남하하셔서 부산 작은 형님 댁 (6.25 전 월남) 에서 사시다 꿈에도 그리시던 부인 (나의 어머님) 과 손자들을 영 못 만나시고 세상을 떠나신 것을 생각할 때 어찌 공산당이 싫지 않겠는가? 이와 같이 어렸을 때부터 공산당의 잔혹상을 보와 온 저로서 공산당 타도에 앞장설 사명을 통감한다.
 

3. 월남.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1). 학도의 용병으로 북진대열에

1950년 6.25 남침이전 북한에서는 벌써부터 전쟁준비를 하고 있었다. 즉 우리 고등학교에는 인민군 소위가 배치되어 군사 훈련을 철저하게 실시하였다. 그리고 많은 청년들을 입대시켜 전투력 증강에 혈안이 되어섰다. 또 우리 학생으로 하여금 방공호를 무수히 파 놓는등 전쟁 준비를 사전에 하였다. 

전쟁초기 그들은 남조선 괴뢰군을 까부수고 승승장구 한다고 인민군 만세를 외쳐 대더니 7월말 들어 우리 고등학생들을 무조건 트럭에 태워 신체검사장(초등학교 교정)에 갖다 내려놓고, 대기하라기에 기다리는 중 들리는 이야기가 전원 인민군에 간다는 말이 퍼졌다. 아니~! 인민군에 가다니 말이 안 되지. 도망갈 방법을 궁리 끝에 누구에게도 말 하지 않고 단독으로 단단히 각오를 한 후 아무도 모르게 빠져 나와 삼십리 길이 넘는 내 집을 향해 그곳을 떠났다. 그러나 갈 길은 낮에도 꺼려하는 호랑이가 나온다는 운암산(평북 철산 소재)을 겁도 없이 야밤에 쉬지 않고 뛰고 뛰어 새벽녘 집에 도착, 어머니에게 군대 안가고 도망해 왔다는 이야기를 하니 잘 했다 하시면서 빨리 숨으라고 하셔서, 제가 출석하는 교회 마루 밑에 목사님께 말씀 드리고 며칠 숨어 있다가, 발각이 될까 두려워 다른 장소로 옮겨 몇 개월 숨어 지냈다. 그러던 중 10월 말 경, 고대하던 국군이 북진해 정찰부대가 신의주를 향해 우리 고장을 통과 했다는 말과 지역 빨갱이 들이 도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숨어 있던 어른과 학생들이 지하에서 나왔고, 경찰서를 접수하고 치안대장 지휘 하에 숨어 있는 공산당원을 색출 하였다. 색출작전 나흘째인 1950년 11월 4일 중공군 기마 부대가 습격해 와 내무서 (경찰서)를 포함 읍내 주위를 포위했다. 잡히면 죽는 목숨 이라고 생각하고 잽싸게 포위망을 뚫고 무조건 남쪽을 향해 서해안을 따라 풍찬 노숙하면서 다다른 곳이 바로 청천강 북단에 위치한 국군 보병 제 1사단 (사단장 백선엽 준장) 주둔지에 고향을 떠난지 9일 만인 11월 13일 피난민의 일원으로 도착하게 되었다.

이때 중공군이 나타나고 한국군이 후퇴하게 되자 공산치하에서 살던 북한 동포들이 앞을 다투어 자유대한을 찾아 피난길에 올랐다. 청천강 북방 철교인근 군부대 집결지에 많은 피난민이 모여 들었다. 피난민 앞에 나타난 15연대 3 대대 정보관 강중위가 피난민을 향해 오시노라 수고 많으셨다고 격려의 말을 한 다음 계속 내려가실 분은 남으로 내려가시고 이 중에 학생들을 향하여 우리와 같이 북진대열에 합류할 학생은 앞으로 나오라고 하기에 저는 일착으로 나갔더니 그 동안 어떻게 지냈냐고 묻기에 인민군에 안 가려고 숨어 있었고 국군이 북진해 오는 동안 4일간 치안대원으로 일하던 중 중공군이 내려와 여기까지 왔다고 하니, 수고했다며 3대대 수색중대에 배치 입대 조치되었다.

입대 후 약 10일간에 걸쳐 기본적인 군사훈련(제식훈련, 소총 취급요령, 총검술, 사격훈려)을 마친 후 완전군장을 갖추고 전투준비를 완료하고, 북진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후 드디어 고대하던 북진명령(반격작전)이 하달되었다. D-Day 아침 일찍 집결지를 출발, 북진대열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북쪽을 향해 첫발을 내딛는 저의 심정은 감개무량 그 자체였다. 물론 나이는 열아홉이지만 작은 체구와 무거운 배낭 위에 박격포 포탄과 키에 맞지 않는 M1 소총 등을 두 어깨에 잔뜩 메었더니 무척 무거웠다. 그러나 빨리 북진해 고향에 두고 온 어머니(인사도 못 드리고 떠남) 뵐 생각으로 힘든 줄 모르고 부푼 마음으로 걷고 또 걸어 그 유명한 영변의 약산을 지나 1차 목적지인 평북 태천에 도착하였다.

대대 집결지에서 중대별로 산개해 휴식을 취하면서 저녁식사를 하려는데 대대 집결지 북방 고지에서 따발총 소리와 총탄이 우리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즉각 우리 소대는 명을 받고 소대장 인솔 하에 총성 방향으로 돌격자세로 사격을 하면서 올라 가 보았으나 적은 간 곳도 없고 흔적만 발견하였다. 하산해 보고하니 전투태세를 유지하면서 대기하라는 명을 중대장께서 하달하였다. 대망의 북진통일의 꿈을 첫 관문에서 멈칫 서게 되었다. 지루한 기다림이 몇 시간 지난 후 바랐던 북진 명령대신 이 밤에 즉각 후퇴하라는 명이 내려왔다. 맥 빠진 마음으로 군장을 다시 메고 도보로 남으로 내려가고 있는데 준비된 군용 트럭이 와 승차하니 한없이 남으로만 내려가고 있었다. 청천강을 건너, 그 어렵게 탈환한 평양을 두고 대동강을 건너 계속 내려가고 있으니 참으로 그 착잡한 심정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이때를 마지막으로 평양은 너무도 멀고 먼 땅이 되었다. 오늘의 민족적 비운, 적화통일을 위해 혈안이 되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대한민국과 민족을 향해 우는 사자와 같이 으르렁대고 있는 저 북한 공산정권이 아닌가.

그런데 공산당 타도를 위한 전진이 아닌 후퇴라니 나로서는 말이 안 되었다. 그러나 상부명령이니 어찌하랴 평안북도를 거처 평안남도를 지나 이제 황해도 사리원에 당도하니 미군을 포함한 많은 부대들이 집결해 있었다. 아마 여기에서 재편성 하여 북진을 계속하는가 했더니 이곳에서 약 20일이 경과한 12월 말경, 역시 북진이 아닌 실망스럽게도 계속 후퇴를 해 12월 29일 임진강을 건넜다.
 

(2). 임진강 방어 작전

드디어 임진강까지 후퇴하더니 강 연안을 연하여 방어 작전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해 마지막 날인 1950년 12월 31일(그날의 암 구호, 한국: 통일) 내일은 새해 1월 1일이라 명절이라고 어르신들(종군 노무자)이 저희를 위해 정성껏 먹을 것들을 준비해 진지까지 갖다 놓았다. 애송이 군인들의 마음은 내일 아침이 기다려지고 한껏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웬 날 벼락인가? 멀찍이 뒤쫓아 오던 중공군의 일제 공격이 개시 되어 포격이 시작되었다.

이때 제 바로 옆에 배치되어 있던 우리 소대 기관총 분대에 직격탄이 명중, 그 앉은 자리에서 전원이 산화하는 비참한 광경이 전개 되더니, 기마 부대를 앞세운 보병부대가 밀물처럼 (인해전술) 몰려와 우리는 손쓸 사이도 없이 삽시간에 방어선이 무너져 아수라장이 되었다. 적군에 사살되고 포로가 되는 형국에 이른 것이다. 이때 살아남은 자는 앞 다투어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CP 에서 전 방으로 가설된 전선에 걸려 넘어지면 퇴각 물결에 일어나지 못하고 압사 되는 사람도 있었다. 집결지에 준비된 차량에 승차, 신속히 이동하였다.
 

(3). 한강방어에서 1.4 후퇴

임진강 방어 전선을 중공군에 탈취 당하고 나서 후퇴해 또 다시 서울을 내놓고 한강이남 사수명령이 하달되었다. 그리하여 저희 대대는 당인리 발전소 건너 영등포 동북부 지역을 담당, 방어에 임하고 있었다. 여기에 대대 작전관(육사 7기생 장 대위)이 우리 앞에 오더니, 절대 물러서면 안 되니 사수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기에 단단히 마음을 먹고 건빵을 까먹으면서 당인리 발전소를 향해 응시하며 적군이 얼음(한강이 얼어 있었음)을 이용 살살 기어오지 않나하고 유심히 보고 있었지만 인기척이 없었다. 새벽이 되었다. 또 후퇴명령이 내렸다. 바로 이날이 1951년 1월 4일 (1.4 후퇴) 이었다. 맥없이 평택까지 철수, 차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4). 군번 없는 학도의용병 귀가 명령

아니, 북진을 위해 입대했는데 귀가 하라니, 이게 웬 말인가? 갈 곳도 없으니 막연했다. 후퇴에 정신이 팔려 우리 학도병들을 위한 입대 절차도 밟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는 수 없이 평안 남, 북도에서 모여든 우리 학도의용병이 일단 모여 인솔자를 우리보다 한 열 살 위인(고등학교 선생 출신) 오태주씨를 뽑고 행동을 통일하기로 하고 1 차적으로 대전으로 출발했다.
 

(5). 보병 제 11사단 재 입대, 공비토벌작전

대전에 당도하니 보병 제 11사단(사단장 최덕신 준장)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간의 과정을 보고하니 반공 학생들임을 확인하고 재입대 조치되었다. 11사단의 임무는 전라남북도 공비토벌 작전이었다. 저희들은 11사단 수색중대(중대장 육사 8 기생 심이섭 대위)에 배치되었다. 사단은 전라도로 이동 사령부는 전주를 거쳐 남원에 위치해 저희 수색중대는 매일 아침 광화루에 구보로 가서 세면하고 머리를 감은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 중대는 사단 사령부 경비 및 미 고문관 숙소 경비를 담당했고 예하 연대는 전라남북도 산간지방에 산재되어있는 공비 및 인민군 잔당 토벌 작전을 전개해 지역 총사령관 인민군 중장 박달까지 처단하는 전과를 거두고 전방으로 이동하였다.
 

(6). 동부전선 투입

공비토벌작전을 마치고 동부 전선이동 명령을 받고, 차량 및 LST (미, 수송선) 으로 동해 속초까지 진출, 하선하여 동부 전선을 담당하고 있는 제 1 군단 산하부대로 설악산 인근 지역에 투입 참전하였다. 최전선에 이동 후, 사단 수색 중대에서 20 연대 1 대대 2 중대 소총 병으로 배치되었다. 설악산 남부지역에서 전방 적응 훈련 즉 행군, 각개전투, 소대전투 훈련 등을 열심히 하고 있던 중 저희 연대에 새 임무가 하달되었다.
 

(7). 3 군단 예하 포위부대 철수 엄호

전방 제 3 군단이 중공군에 포위되어 철수 중인데 아군 철수부대 엄호연대로 전방에 투입되었다. 철수 부대 엄호 임무를 수행하던 중 저의 부대 역시 적에게 포위당하였다. 이때 대대와의 통신도 두절되어 자체능력으로 포위망을 돌파해야 하는 급박한 상황이 되었다. 우리 중대장인 권보현대위(일군출신 육사 8기 특별)가 학도병 출신인 (당시 사병 수준이 거이 무학자) 저희들에게 로켓포를 쏴 보라고 해서 제 친구가 나가 로켓포를 발사했더니 용케 목표지점을 명중시켜, 많은 희생을 입었는지 조용해져 그 틈을 타 그곳을 돌파, 적들을 뒤로하고 대대 집결지를 향했다. 그러나 며칠 굶은 탓으로 배가 너무 고파 옆 전우가 주는 말라비틀어진 강냉이를 나누어 먹으며 요기를 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잠도 제대로 못 잔 관계로 비틀거리며 가는 길, 앞뒤로 사방고지에서 중공군이 쏘아대는 총알이 떨어지지만 잠에는 장수가 없다고 누적된 피로로 쓸어 지곤 해 전우들끼리 서로 자면 죽는다고 야단을 쳐가며, 겨우 대대 집결지에 도착해 인원 점검을 해 보니, 혹은 전사 또는 실종으로 눈에 안 보이는 친구 몇이던가! 꽃도 피어보지 못한 채 그렇게 가다니! 전쟁은 참으로 비참한 것!
 

(8). 포로경비 임무

숨 돌릴 사이도 없이 포위망을 뚫고 나오니 새 임무가 주워졌다. 전라도 광주 (송정리) 소재 포로수용소 경비임무를 받고, 전대대가 송정리로 내려갔다. 그곳 경비임무 수행 중 특기할 것은 동족상잔의 아픔을 뼈저리게 통감하며 괴로웠던 일, 다름 아닌 경비병의 감시를 받으며 작업장에 나타난 ‘PW’ 자를 크게 새긴 옷을 입고 나온 인민군 포로 가운데 낯 익은 얼굴을 보았다. 바로 그 애가 제가 이북고등학교 다닐 때 같은 반에서 공부했던 이영기가 아닌가! 이때 감정은 착잡했다. 야! 영기야 불러보고 싶었지만 포로와는 대화가 금지되어 있어 그러지 못하고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으려니 답답했다. 그 친구는 분명 공산당원 자식은 아닌데, 전에 이북에서 인민군에 보내려고 같이 끌려갔을 때 나는 도망을 했고, 친구는 용기를 못낸 탓으로 이 고생을 하고 있으니 자기 자신이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그 친구 작업을 마치고 수용소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니 김일성 수괴가 더욱 미워졌다. 당신네들은 우리 가족이 반동이라며 내쫓았지만 민족 반역자, 반동은 공산당 당신네들임을 더욱 마음속으로 다지게 했다.
 

(9). 동부전선 최전방으로

포로 경비 임무를 인계하고 강원도에 위치한 동부전선 향로봉을 향했다. 향로봉 남방 골짜기에 있는 건봉사(CP 위치)를 지나 정상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완전 무장을 하고 1200 고지를 올라가려니 무척 힘이 들었다. 올라가보니 우리 부대에 지역 및 임무를 인계하고 떠난 수도사단의 전투 흔적이 역력했다. 고지 최정상에 중대 본부(OP)가 위치하고 저의 소대는 전초소대로서 약 1.5 km 떨어진 전방관측이 양호한 지역, 감제 용이한 고지이지만 외딴곳이었다. 저는 소대 연락병으로서 중대 본부에 파견 되어 중. 소대 간 연락 차 하루에도 몇 차례식 왕래해야 했다. 그런데 통로 좌우에는 인민군이 내 버려두고 간 시체가 퉁퉁 부어 오른 상태였기에 처음에는 섬뜩했다. 이곳에 이렇게 많은 시체들을 버려두게 된 것은 향로봉 탈취 여부가 피아간 전세결정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악착같이 싸워 우리도 적지 않은 희생이 있었지만 적들에게 치명타를 입혀 그 많은 시체를 버려 둔 채 퇴각하였다고 한다. 이를 인수한 저의 부대는 이곳에서 지역방어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10). 884 고지 공격 작전 참가

드디어 884 고지 공격 명령이 하달되었다. 884 고지는 향로봉 동쪽 우 전방에 위치하고 있다. 우리 대대는 명에 따라 집결지를 떠나 공격대기지점에 도착, LD (공격개시선) 출발 명령을 기다리고 있을 때 884 고지 방어 중인 적은 우리 부대를 향해 일제히 공세 제압을 위한 포병사격을 가해왔다. 이때 저는 소대전령으로서 소대를 떠나 중대 본부에 가있을 때였다. 적 포탄이 저의 소대본부에 직격탄이 떨어져 소대장 이하 소대 본부 요원 전원이 산화하고 말았다. 저도 그곳에 있었다면 오늘은 없는 나, 그 참화 속에서 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것 감사하며 먼저 간 그들의 몫을 다 해야 할 책임을 통감했다.

LD (공격개시선) 출발시간이 되자, 적 포화가 빗발치듯 날아오지만, 우리 역시 동해에 위치한 미 해군 함포와 아군의 각종 포병지원 하에 공격 개시선을 넘어 적진을 향해 나갔다. 물론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이 고지는 탈취함으로써 아군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요지요부이기에 만난을 무릅쓰고 전진해 돌격선에 도착, 전 부대가 집중사격을 가하였지만 유독 적 기관총사격은 계속 되, 사각을 이용 낮은 포복으로 기어 올라가 적 기관총 사수를 사살하고 보니, 손과 발이 꼭 묶여 있어 꼼짝 못하고 비참한 꼴로 죽어 있었다. 아무리 전쟁이지만 못 볼 것을 본 것 같았다. 이곳 밴쿠버에와서 884 고지에서 같이 싸웠던 전우 박영길 선배를 만나 부상으로 후송됐던 일, 그때 치열한 전투이야기를 나누며 여생을 같이 하고 있다.
 

(11). 884 고지 방어 작전

이 고지 앞에는 동서로 흐르는 천연 장애물인 남강이 있어 방어에 유리하고 외금강을 볼 수 있는 지역 내 감제고지로서 아군 작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지요부 이기에 사단 전체가 동원 되었던 것이다. 고지 탈환 후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경계에 임하고 있었다. 소강상태인지라 적의 동태를 알기위한 정보수집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남강은 유속이 빨라 도강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우리 부대 인접에 배치되었던 미군부대 정찰요원은 적진에 가 정보를 수집하고 적병의 귀를 잘라 온다는 말을 들었었다. 이러한 용감성과 책임완수의 모습은 나로 하여금 파월 대대장 근무 시, 자유월남을 위해 힘써 싸우는데 좋은 교훈이 되었다. 이 곳 방어 작전 시 폭설이 내릴 때는 미군 수송기(시누크)에 의한 낙하산 보급도 받아 보았고, 골짜기에 내려가 식수를 받으면서 위를 보면 얼어 있는 적 시체를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악 조건 하에서 학도병으로 공산군과 싸웠으며, 병장(군번 0720167)으로 1952년 말경 최전방을 떠나 육군 보병학교에 입교하였다.
 

4. 휴전 후 장교로 복무
 

최전선에서 나름대로 오로지 생각한 것은 북진통일 뿐이었다. 언젠가는 북진을 할 것인데 장교로서 당당하게 고향땅을 밟아야 하겠다는 사명감을 갖고 육군보병학교에서 소정의 교육을 마치고 소위로 임관하였다.

임관 후, 소대장직을 시작으로 각급제대 참모, 지휘관으로서 27년간 복무 후 육군대령으로 예편하였다. 기간 중 국내 전후방지역 에서 대간첩 작전임무를 담당수행 하였으며 특히 월남전에 참전, 수도사단 1연대 3대대(재구대대)장으로서 재구 72-3호 대대작전에서 월맹군 보급창을 탐색 탈취 하여 식유 수십 드럼, 쌀 십여 톤 등 다수의 전리품 (노획물품) 수송을 위해 시누크(수송기)가 동원, 수송작전이 전개 되었다. 이를 월남 신문, 방송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노획품은 대대장 입회하에 맹호사단장이 빈딩성장에게 전달하였다. 이 작전으로 대대장에게는 충무무공훈장과 월남국 최고 훈장이 수여되었고 예하 장병 에게도 훈장이 다수 수여 되었다 (파월전사에 수록).

맺는말: 6.25 와 같은 동족상잔의 비극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참화였다. 이는 김일성 공산집단의 적나라한 적화통일 야욕의 실상을 보여주었다. 이제 그들의 참모습을 보았고 알았으니, 전 국민이 대오각성, 정신을 차리고 철저하게 대비해 제 2의 불장난을 막아야 할 것이다. 나뉘면 망하고 뭉쳐야 산다는 엄연한 진리를 명심해야 할 절박한 때이다. 한편 6.25 는 공산치하에서 신음하던 이북동포 500여만명을 구출해 낸 민족적 대 구출작전(Exodus)이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 생각한다.

위에서도 몇 차례 언급한 바 있지만 6.25 전쟁은 물론 월남전 참전 시에도 구사일생(파월기간에도 적 포화로 대대장 전사 보고된 사실도 있었음)으로 살아남은 자로서 앞으로 해야 할 사명을 다 하는 것이 오늘을 있게 하신 하나님께 그리고 먼저 간 전우들에게 보답하는 최선의 길임을 절감한다. 제대 후 5년간 주요 기업체, 비상계획 담당관 복무를 끝으로 공직에서 은퇴하였다.

5. 캐나다 이민 생활
 

뜻한바 있어 캐나다 이민을 결심, 1992년 3월 27일 온 가족이 함께 밴쿠버 공항에 도착, 영주권을 취득 후 이민 생활이 시작되었다. 캐나다는 우리나라의 국권회복을 위해 애써주신 분들이 계시는 나라다. 즉 한국 서울대학교 교수로 봉직하신 스코필드 박사는 3.1 독립선언서 서명자 33인에 추가하여 34인 중에 한분으로 기억되는 분으로서 우리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다방면으로 수고하신 분 이시다.

또 한분은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의대를 졸업하신 하디 선교사님으로 미개한 우리나라에 기독교 복음 선교를 위해 의사로, 선교사로 순교적 신앙심을 갖고, 1890년에 부산을 거쳐 서울로 올라와 의료와 선교에 힘쓰셨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을 시작했고 이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한 우리민족을 그렇게 사랑한 분 이셨다. 실제로 살아보니 친절이 몸에 밴 시민사회 본받아야할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애정을 갖게 해주었다. 즉, 길을 물으면 말로만 알려 주는 것이 아니라 몸소 안내해주는 친절 너무 고마웠다. 옆집에 눈도 치워주고, 캐나다를 바르게 알려주려는 성의를 높이 사게 되었다.

이 나라에 온지도 어언 만 26년이 넘었다. 그간 교민을 만나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되었고 선배와 친구들의 소개로 밴쿠버 노인회장, 한인회 이사장, 평통자문회의 밴쿠버 협의회 종교분과 위원장, 6.25 참전 유공자회 회장과 밴쿠버 재향군인회와 6.25 참전 유공자회, 월남 참전 유공자회, 밴쿠버 기독군인회 등, 참립에 참여한바 있고 이 모든 단체와 오늘 현재 유대를 강화하고 있다. 남은 삶, 동료들 그리고 선배님과 형제자매들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는데 계속 노력 할 것이다.

이 지면을 통하여 캐나다 창립150주년을 축하드리며 이 나라와 온 국민에게 하나님의 한량없으신 축복을 기원 드립니다.
 

※ 저는 여생 반공의 향도로써, 또 밴쿠버 교민의 화합과 지역 사회 발전을 위해 미력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