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


권천학: 들꽃으로 피어난 사랑의 혼

2006년 어느 가을 날, 토론토 구 시청 건물 앞을 지나려다가 모여 있는 군중들이 있어서 발길이 멎었다. 가족과 함께 낯선 시가지 구경을 나선 참이었다. 하늘은 회색으로 나지막하게 내려앉고 쌀쌀했다. 사람들이 웅장한 느낌의 고풍스러운 석조 건물 앞의 거리와 뜰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리멤버런스 데이(Remembrance Day) 기념식이라고 했다. 한국으로 치자면 현충일 기념식이다.

11월 11일 11시, 너무나 기억하기 좋은 날짜와 시간의 배합이었다. 캐나다인들은 기념일을 정하는데도 매우 실용적이구나! 서구사람들의 합리주의가 기본적으로 깔린 생활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뒤에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11월 11일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종전일이었다. 1,2차 세계대전에서 목숨을 잃은 캐나다 장병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종전 일을 기념일로 정했다. 세계대전이라는 명칭은 알고 있어도 종전일은 잊고 있던 나의 무심함, 그리고 그동안 현충일에 대한 인식도 차이가 있어 낯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고국에 있을 때 과연 현충일을 이토록 진지하게 보낸 일이 있었던가. 고백컨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따라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식순에 들어있는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도 진심으로 경의를 가지고 임했던가? 식의 분위기에 따라 경건함을 가지긴 했지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 것 같지는 않았다.

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사람들 틈을 비집고 조금씩 앞으로, 식이 진행되는 중심으로 파고들었다. 짙은 남색의 군인 유니폼으로 보이는 옷을 입고 베레모를 쓴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식을 진행하고 있었다. 유니폼과 베레모에는 색색으로 표시된 훈장마크가 붙어있었다. 모두가 중후해보였다. 베테랑(veteran)들이었다. 상식의 수준에서만 알고 있던 ‘베테랑’이란 영어단어가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시민들이 섞여 에워싸고 있는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베테랑이든 일반인이든 모두 옷깃에 빨간 꽃을 달고 있었다. 양귀비라고 했다. 왜 양귀비를 꽂고 있는지 몰랐다. 궁금했지만 그 자리에선 당장 알아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동유럽에 갔을 때 체코와 헝가리의 들녘에 피어있던 양귀비가 스쳐지나갔다.

그때 누군가가 팔을 뻗어 내 깃에 빨간 양귀비를 꽂아주었다. 주름이 굵은 베테랑의 손이었다. 낯선 손을 따라 올려다보았다. 미소를 가득 담은 베레모의 중후한 얼굴이 찡긋, 윙크를 하고 돌아섰다. 참 따뜻했다.

빗줄기가 굵어졌다. 빗줄기에 버무려진 추위가 을씨년스러웠지만 자리를 뜨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웅성거림도 없이 모두가 진지하고 경건했다. 나도 따라서 진지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키 큰 사람들의 어깨너머로 발돋움을 해가며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로 진행되는 식의 분위기에 합류하며 지켜보았다.

식이 끝날 무렵, 브라스밴드가 연주하는 캐나다 국가가 저기압의 공기 속으로 낮게 깔리며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갑자기 까닭 모를 전율이 느껴졌다. 떠나온 내 나라 대한민국이 생각났다. 그리고 갑자기 삼촌 생각이 났다.

나의 막내삼촌은 한국전쟁의 전사자였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라 나는 삼촌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부모님을 통하여 삼촌이 어린 첫 조카인 나를 매우 귀여워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할머니는 막내아들인 그 삼촌을 나라에 바친 대가로 한국정부로부터 국가유공자 원호금을 돌아가실 때까지 받았었다. 그럼에도 나는 무심했다.

그날, 나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참전용사와 순국선열에 대한 진지한 경의를 갖지 못 했었음을 인정하며, 마음이 새로워짐을 실감했다. 인생 후반기의 삶을 낯선 캐나다에서 시작한 내가 캐나다의 리멤버런스 데이의 기념식을 보고 잊고 있었던 삼촌을 떠올리게 되다니.

그 후, 정착을 시작한지 반년 정도 되었을 무렵의 어느 주말, 가족들과 함께 하는 주말여행으로 브램튼(Brampton)에 들렸었다. ‘한국전참전용사 위령의 벽’ 앞에 서서 먼저 떠올린 것은 베를린 장벽과 다하우 강제 수용소에 방문했을 때의 기억이다. 베를린 장벽은 이제 무너졌으니 세계인들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역사의 유적이 되었다. 나는 다하우 강제 수용소 방문했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시멘트벽에 불규칙하게 긁힌 손톱자국들, 아직도 그 자국에서 핏물이 배어나오는 것 같아 나를 몸서리치게 했던 가스실 벽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 그런데, 살기 좋은 나라로 손꼽는 캐나다에 위령의 벽이 있다니, 모두가 누리는 지금의 평화가 수많은 이들의 희생의 대가라니, 위로하며 기려야 할 영혼들이 이 평화로운 나라 캐나다에도 있다니, 더구나 내 조국인 한국전쟁에서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라니,…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Si vis pacem para bellum!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

기억 속에 박혀 있던 라틴어 문장이 떠올랐다.

내가 몰랐구나! 너무 무심했구나! 전율이었다. 리멤버런스 데이의 구 시청 앞에서 느꼈던 전율보다 더 강한 주파수였다. 충격파에 감전이라도 된 듯, 위령의 벽에 새겨진 이름들 앞에 깊이 마음까지 숙이며 한동안 서 있었다.

나는 천천히 캐나다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캐나다인이 되어간다는 것은 캐나다의 낯선 사람, 낯선 거리, 낯선 문화에 적응하며 캐나다를 배워간다는 말이다. 어려움도 많지만 즐거움이 많았고, 그 즐거움은 많은 이들의 숨은 덕분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내가 이유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소액의 돈이 불규칙하게 정부로부터 왔다. 세금의 반환이라고 하는 것 같았는데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때까지 세금을 되돌려주는 것을 경험한 일이 없었다. 그 돈을 꼬박꼬박 통장에 모아두었다. 나중에라도 불쑥 그 돈 내놔라!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를 대비해서였다.

어쩌다 몸이 아파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거나 입원을 했다가 퇴원할 때도 병원비를 치르지 않고 그냥 가족들의 이끌림을 받아 나오며 조마조마했다. 누군가가 저만큼 가고 있는 나를 불러 세워 왜 치료비를 안내고 가느냐고 따질 것 같아서였다. 그렇다고 캐나다의 생활이 다 좋고 다 나에게 딱 맞는 것만은 아니었다. 더러는 안 맞는 것도 있고, 더러는 불편하다고 여겨지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이 대개는 낯 설기 때문이었고, 적응해나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천천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끝내 수긍하지 못하는 것은 이곳의 상황에 맞게 만들어진 것이라고 이해하면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리멤버런스 데이에 왜 양귀비꽃을 옷깃에 꽂는지도 알게 되었다. 당시에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는 시 '플랜더스의 들판에서(In Flanders Fields)'를 읽으면서 내가 만났던 체코와 헝가리의 양귀비 가득 피어있던 들판을 떠올렸고, 플랜더스는 아니지만 그 들판 어디쯤의 양귀비 둔덕에 누워 그 시를 읊조리며 사라진 전우를 그리워하는 참전용사의 모습을 상상하기도 했다. 그렇게 이런 저런 경험을 하면서 어색함도 조금씩 줄어들며 적응해나가다 보니 이해가 되고, 받아들여지고, 얻는 것이 많았다.

나는 지금 이 나라, 캐나다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소중하다. 살아갈수록 ‘캐나다’라는 나라가 고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중에서도 참전용사에 대한 고마움이 가장 먼저, 새롭게 다가왔다. 우리나라와 정식으로 수교를 맺기 이전인 한국전쟁 때 바다 건너 먼 길을 찾아와서 우리를 도와 목숨 걸고 싸워주었으니 그것이 바로 혈맹이 아니고 무엇일까. 그동안 그저 문장 속에 박힌 평범한 단어일 뿐이었던 ‘혈맹’의 의미가 진지하고 무겁게 다가왔다. 목숨 바쳐 도와준 그 고마움을 무심하게 넘겼다는 것이 죄스러웠다. 제 2의 조국이 된 캐나다를 위해서 뭔가를 할 수 있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러나 나는 늘 부족하고 미약했다. 고작 열 살과 여섯 살인 손주들로부터 캐나다 국가를 배우고, 나는 손주들에게 우리의 애국가를 가르쳤다. 어린 녀석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지금 어린 손주들은 한국 동요와 함께 애국가를 4절까지 다 부를 줄 안다. 잠들기 전에 캐나다 국가와 애국가를 차례로 부른다. 나는 그렇게 캐나다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2015년, 밴쿠버에 살고 있을 때 버나비시(Burnaby)의 센트럴 파크에 있는 스완가드 스타디움(Swangard Stadium)에서 초등학교 크로스 컨트리(Cross Country) 대회가 열렸었다. 4학년인 손자가 학교대표로 출전하게 되어 응원하러 갔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무들 사이로 특별해 보이는 조각상의 윗부분이 보였다. 궁금했다. 그런데 얼마 후 우연한 기회에 밴쿠버의 한 원로 어른의 안내로 그 궁금함을 풀게 되었다. 그것은 버나비시의 센트럴파크 안에 건립된 한국전쟁 참전을 기념하는 ‘평화의 사도상(Ambassador of Peace)’이었다.

뒤편으로 전몰자 이름이 새겨져있었다. 돌 벽에 새겨진 이름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사죄하는 마음으로 읽어나갔다. William Allan Rathbun, Louis Charles Roberts, Jack Fraser Riddle, Lloyd Keith Wylie……

지극한 인류애의 구현과 자유와 평화에 대한 열망을 실행한 그 열정에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눈물겹게 고마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는 사랑하는 아들과 딸을 보냈을 것이고, 누군가는 연인을, 누군가는 나처럼 삼촌을, 그리고 조카를, 또 누군가는 장래가 촉망되는 제자들을.....바다 멀리 불타고 있는 대한민국으로 25,687명이나 보냈다. 그들 중에 516명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서 돌아온 분들 중에는 부상을 입은 사람도 있고, 설령 육체적 부상을 입지 않았더라도 전쟁에서 겪은 외상 후 스트레스로 평생을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분들도 많다. 아마 거의 모두가 그럴 것이다. 전쟁은 그토록 참혹한 것이다.

또 다시 가슴이 뛰었다. 리멤버런스 데이에 느꼈던 전율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해야 할 도리를 잊고 사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부끄러움과 함께 마음속에 돌덩이 같은 짐을 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도 내내 마음속의 짐을 내려놓지 못했다. 뭔가를 해야 했다. 그것이 무엇이든,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이라도 해야만 했다.

뒤늦게 접하게 된 <KBS 스페셜-허시 형제 이야기, 캐나다 판 태극기 휘날리며>의 조셉(Joseph)과 아치 형제(Archie Hearsey)의 이야기는 가슴 속을 또 한 번 휘저어놓았다. 슬로베니아에서 열린 국제 펜 회의에 참석하는 여행길에서 시가지의 거리게시판에서 그 얼마 전에 한국에서 흥행했던 ‘태극기 휘날리며’의 영화 포스터를 보고 울컥 했던 감회가 살아났다. 그때는 우리의 영화가 이 먼 나라까지 와서 상영된다는 뿌듯함이었다. 그러나 허시 형제 이야기는 실제로 목숨 바쳐 내 나라를 지켜준 캐나다 용사에 대한 감동 스토리. 그 나라에 와서 살게 된 나의 자세를 더욱 공고히 해주는 이야기였다.

1951년 10월 13일, 당시 21세이던 아치는 중공군과의 격렬한 야간 교전을 치른 직후에 인근 참호에서 자신과 같은 성을 가진 병사가 총상을 입고 중태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간다. 뜻밖에도 형 조셉이었다. 형이 자신의 뒤를 따라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던 아치의 놀라움과 슬픔은 경악 그 자체였다. 어깨에 총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던 형은 초점 잃은 시선으로 동생을 바라보면서 동생의 품 안에서 숨을 거둔다. 전쟁이 끝나고 조셉은 부산의유엔참전기념공원에 안장된다. 아치는 형을 가슴에 묻고 캐나다로 돌아온다. 돌아왔으나 형을 한날한시도 잊어버린 일이 없다. 어찌 잊겠는가. 동시에 한국을 어찌 잊어버릴 수가 있겠는가. 아치는 형에 대한 그리움과 자기만 살아 돌아왔다는 죄책감으로 얼룩진 전쟁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평생을 보낸다. 그는 형 조셉과 함께 묻히고 싶다는 마지막 소원을 안은 채 2011년 6월, 이 세상을 떠난다. 그의 소원이 한국정부에 전달되고, 드디어 부산의 유엔참전기념공원에 형과 함께 합장 안치된다. 61년 만에 이루어진 형제의 영혼 만남이다.

개인의 자유가 아무리 중요하다해도 나라가 없으면 무슨 소용인가. 나라가 없으면 개인의 자유나 평화는 아무 의미가 없다.

나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마음의 짐을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한 편의 시를 썼다. 나와 우리나라에게 베푼 캐나다의 고마움에 대한 ‘보은의 시’이다.

 

보은의 시

들꽃으로 피는 사랑의 혼

-한국전쟁에 참전한 캐나다 용사들에게 바치는 시

권 천학

 

사랑의 혼으로 꽃이 되신 그대들이여!

당신의 하늘이 우리의 하늘이고

우리의 하늘이 당신의 하늘입니다

그대들의 그날이 바로 우리의 오늘이 되어

당신의 나라 캐나다에 우리가 있고

그대들이 목숨 바쳐 자유를 지켜낸 그 과거가

우리가 함께 가야 할 미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많은 사랑 중에 가장 고귀한 사랑은

목숨 바쳐 지키는 사랑입니다

가장 고귀한 사랑을 실천한 그대들을

어찌 잊겠습니까

더러 잊은 듯, 더러 무심한 듯해도

한 시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어디에 있은들, 긴 세월이 흐른다 한들

그대들의 고귀한 정신이 어찌 지워지겠습니까

한국의 들꽃이 되어

한국의 하늘 아래 혼을 뿌리신 당신들

이곳에 있는 우리들은 그 뜻을 새겨

당신 나라 캐나다의 들꽃으로

캐나다의 산야에 뿌리를 내리며

한 송이, 한 송이, 꽃의 이름으로

당신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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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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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 한국전쟁에서 산화한 캐나다의 참전용사 (한국전쟁에 목숨을 잃은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 출신의 36명의 군인)

*: 한국전쟁에서 생환한 캐나다의 참전용사.

 

A Poem of Gratitude:

The Spirit of Love That Blooms as a Wild Flower

--a poem dedicated to Canadian veterans of the Korean War

by Cheonhak Kwon

Translated by Hana Kim and John Mokrynskyj

 

Oh you who became flowers through the spirit of love!

Your sky is our sky,

And our sky is your sky.

Those bygone days of yours have become our present day

We are here in your country of Canada

because the past in which you laid down your lives for freedom

has become the future in which we must all go together.

Among the many kinds of love,

the most precious is that in which one sacrifices one’s life for the sake of love.

How can we forget you,

who have manifested this kind of love?

Even if it seems that at times we have forgotten or are indifferent,

we have never for a moment forgotten.

No matter where, no matter how many long years have passed,

your noble spirit will not be extinguished.

You, who became wild flowers of Korea,

who scattered your spirits beneath Korea’s skies.

We who are here keep this in mind,

and as wildflowers of your country of Canada,

we put down our roots into Canada’s plains

and call your names, like flowers, one by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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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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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

✿: those Canadians who heroically perished in the Korean War (36 soldiers from British Columbia who died in the Korean War)

*: Canadian veterans who returned from the Korean War

 

이제, 아치와 조셉 형제는 한국에서 전사하고 한국 땅에 묻힌 모든 병사들과 함께 한국의 들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캐나다에 와서 살고 있는 나도 캐나다 땅에 묻힐 것이고, 캐나다의 들꽃으로 피어날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조국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제2의 조국이 된 캐나다, 캐나다 건국 150주년을 축하한다. 그리고 목숨 바쳐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을 지켜준 많은 분들에게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하며 옷깃을 여민다.

캐나다에 와서 살고 있는 우리는 모두 캐나다에서 피어날 들꽃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를 모든 한인 이민자들의 이름으로 바친다. 그리고 위령의 벽이 있는 참전용사들 앞에 헌정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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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연락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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