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근효


배근효: 제3막 인생과 밴쿠버 대첩 

1. 프롤로그

.”1945년 해방되자마자 한반도에 38선이 생기면서 남과 북이 참으로 혼란할때 손원일제독은 반년도 안되어 해군사관학교를 세웠다(1946.1.17). 나는 오늘날 대양 해군을 지향하는 한국 해양력의 필수조건인 우수한 인력을 배출하는 해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충무공 이순신과 손원일 제독의 해양정신을 배웠다는 사실에 무한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대한민국에 손원일 제독과 같은 우리의 선각자가 군함 한척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해군을 창립하고 해군사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일찌기 나라의 등불이 되었다는 것은 민족의 큰 복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없어도 오늘날의 해양 한국이 가능했을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다.  손원일 제독 일대기에 나타난 그의 사상, 인격과 생애를 요약한 글귀를 잠시 소개해본다.

그는 부에 연연하지 않았고, 권세에 휘말리지 않았으며, 명성을 탐하여 비굴하지도 않았고, 공과 사가 분명했다. 결코 사심을 품는 없이 나라와 국민을 사랑하며 명예로운 신사 해군 으로, 진정한 대장부로 깨끗이 살았다. 그는 대장부 부재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사람은 이렇게 살다 가는 것이란 것을 말없이 보여주었다

당신이 전쟁터에 나가십니까?-한번 기도하십시요.
당신이 바다에 나가십니까?-그러면 두번 기도하십시요.
당신이 결혼 하십니까?-그러면 당신은 세번 기도해야 합니다.
유명한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1828~1910)가 한 말이란다.
물론 이 말은 위험한 전쟁터나 바다에 나가는 것 보다 결혼생활 즉 인생살이가 더 힘든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그가 20세기 초까지 살았으면서도 바다에 나가는 것은 전쟁터에 나가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고 한 것을 보면 천문학과 항해술이 발달한데다 인공위성의 도움까지 받는 요즘과는 달리1세기 전만 해도 바다는 전쟁터 보다 더 위험하여 사람들이 꺼리는 모험의 대상이었다. 그 위험한 바다를 정복한 나라가 세계를 지배하는 역사는 아직도 변하지 않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우리 역사에도 일찌기 동양의 해상왕 장보고는 극동의 바다를 다스렸고, 충무공 이순신의 한산대첩을 비롯한 임진왜란 때의 세계 해전사상 그 유례가 없는 기적같은  해전의 완승은 자칫 조선왕조가 문을 닫을지도 모를 역사의 큰 흐름을 막아준 장거였다. 이후 바다를 다스리지 못한 대가로 우리는 잠시나마 나라를 잃는 암울한 시대를 맞아야 했지만, 지금은 세계가 우러르는 세계10위권의 경제대국을 이룬 배경에 우리 한국의 커진 해양력의 힘을 가늠해 볼 수 있다.

2. 55세에 쓰기 시작한 나의 이민 이야기

2009년5월초 나는 밴쿠버발-인천행 항공기를 탑승했다. 어쩌다 고국을 한번 방문하는 여행이 아니다.
모국의 해군사관학교 총동창회에서 동창회 창립 20주년을 기념하여 제정한 제1회 해사인 상(海士人 賞) 시상식에 참석키 위함이었다. 
해군에서 열정을 다해 국방의무를 다하고 전역한 후,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면서 해양인으로서 살다가  뒤늦게 이민와서 치열하게 살았을 뿐인데 이처럼 귀한 상을 받다니! 내년이면 나도 고희가 될 만큼 살아 온 인생에 이처럼 감격스런 여행을 해 본적이 없다.

인천에서 중고교를 졸업(인천고)하고, 1960년 해군사관학교에 입교, 1964년 졸업 및 임관후, 정확히 10년간 삼면의 바다를 지키는 국토방위의 임무를 마치고 전역할 때까지를 나의 1막인생 이라면, 1974년 전역후 오대양 육대주를 무대로 해양생활한 것은 2막 인생이라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적지 않은 나이인 50대 중반, 낯설고 물설은, 그리고 말설은 미지의 땅 캐나다에서 시작한 새로운 삶을 나는 덤으로 사는 제3막 인생이라 부른다.

제 1 막 인생을 내린 용기

해군소령시절 소해함 함장의 임무를 완수했을 때가 1973년초, 나는 한국 함대사령부(현 해군 작전 사령부) 작전기획관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수행하게 된다.
그 해 여차 저차한 연유로 해병대 사령부를 없애고 해군에 편입시키는 작업으로 인하여, 나는 작전계획, 비상통제계획, 재난통제계획 및 선박 통제계획 등 이른바 전쟁 발발시의 모든 계획과 현행 작전 명령등을 개정하는 엄청난 작업의 실무 책임자로 동분 서주 일해야 했다. 지나고 보니 함대사령부 작전기획관으로 근무하던1973년 1년간 특별근무를 안한 주말이 불과 몇주에 불과할 만큼 참으로 바쁘게 일하면서 무려 13권이나 되는 두터운 책(작전계획,명령등)을 발간하였다.

그 와중에 나는 당시 나의 인생관과 장래에 대한 구상과 관련하여 심각한 고심 끝에, 10년만기 전역키로 결심하고 전역원서를 제출해 놓은 상태였다. 직속 상관들 심지어는 함대사령관에 이르기 까지 전역을 극구 만류하여 일단 포기하고 있었지만, 바뀔 수 없는 운명의 장난인지 우여곡절 끝에 하루도 빠지지 않은 10년만인  1974년 2월말일, 전격적으로 전역하게 되고, 곧 바로 대형 유조선 항해사로 제2막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주요 직책에 선발되어 주어진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며 선배들의 신뢰를 받던 나로서는 실로 용감 무쌍한 전역 결단이었다.

제 2막 인생과 가치관의 재정립

유조선 항해사 임무를 수행한지 5년만에 캡틴(선장)으로 진급하고 근무하던 중, 1982년부터 약4년간 해양생활을 잠시 접고 어렵게 직장을 구해 다니면서 아침 저녁으로 엉뚱하게도 성경을 연구하는 생활에 깊이 몰입하게 된다. 이때 공부하여 터득한 성경을 통하여 나는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인생관, 국가관, 세계관, 직업관, 종교관 및 가정관 등 모든 인생의 가치관을 새롭게 정립하면서 보이지 않는 내면세계에 대한 관심을 쌓아가게 된다. 이후 나는 지금까지 그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명상과 성찰을 계속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내 인생의 중심에 가장 중요한 가치로 자리잡게 된다.
그때 정립된 인생의 새로운 가치관은 내가 뒤늦게 새로운 삶의 도전의 길로 접어드는 데에도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한참 후였다.

성경에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가장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결과로1986년초 다시 유조선 선장으로 취업하게 되고, 그후  3년만인 1988년말 해양생활은 완전히 청산하게 된다.

이때 부터의 서울생활은 극도의 혼란 그 자체였다. 사회생활 경험이 없는 선원출신으로서는 감당하기 쉽지 않은 한국의 비지니스 환경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젊어서 부터 군인, 선원, 교사 및 공무원 등 특수 사회에서 잔뼈가 굵은 그래서 비즈니스 세상에 대한 무경험자들이 일반적으로 겪는 여러가지 어려움과 좌절, 그리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던 중 가장 큰 핸디캡인 나이가 많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유조선 캡틴사절 비교적 자주 드나 들었던 북미주(캐나다)로 이주하기로 결심한 것이 90년대가 들어서면서 였다.

친척, 친구, 선후배 등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남들은 이제 은퇴할 그 나이에  도대체 무엇때문에 떠나느냐고 나보구 미쳤다고 했다. 풍부한 자금을 들고 가서 여생을 좋은 환경을 즐기며 살 수 있는 처지도 아니면서---.
내 스스로 생각해도 정상적인 사고로는 결정하기 힘든 결단이었다. 아내와 두 아들을 어렵사리 설득하여 이민 수속을 시작하게 된다. 보유재산 규모, 나이등 몇가지 문제가 있는 자격조건을 잘 극복하고 신청한 지 2년만에 천신만고, 기업이민이라는 조건부 영주권을 받자 마자 망설임 없이 즉시 떠난 것이 1995년 봄!

나는 이민 가는 것이 조국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 한국적인 현실에서는 또 다른 개념의 애국이라고 애써 강조하면서 떠났다. 내가 정착하여 사는 그 나라에 대한민국의 영토가 그 만큼 넓어지는 것이라고---.
좁은 국토에 많은 사람들이 밀집되어 살아가는 현실을 생각할때 이것은 아직도 변함없는 내 소신이다.

새로운 도전 3막 인생

1995년5월초, 55년간 정든 고국을 뒤로 하고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다는 캐나다 밴쿠버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첫발을 디뎠다. 마치 아브람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는 심정이랄까!  내가 어디에 살건 끊임없이 치열하게 부딪혀야 하는 나그네 인생길, 캐나다라는 새로운 세계는 신기함이나 호기심으로 다가오는 경이로움과, 한편 두려움과 불안이 함께 오버랩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지금껏 내 뜻대로 살아 온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어떤 손길에 의해 살아지고 있다는 믿음은 비록 갈바를 알지 못하고 떠나는 여행일지라도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향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기쁨이고 행복이며 삶의 의미일수 있다.

당시 밴쿠버에서 만나는 모든 이민 선배들로 부터 2년내에 비지니스를 시작하면 되는 것이 <기업이민>이므로 관광도 하고 사회 분위기도 익히면서 사회 적응력을 키우라는 우정 어린 권고를 받았지만, 워낙 손에 쥐고 있는 자금의 한도가 턱도 없는 규모여서 그렇게 한가하게 시간을 보낼 여유가 없었다.

도착하는 그 이튿날부터 할 만한 비지니스를 눈을 부릅 뜨고 찾기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깨달은 것은 내가 가진 자금 규모로는 한 가족의 생계를 보장할 수 있는 비지니스가 하늘의 별따기라는 사실이 었다. 어려움을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지만 참으로 난감한 실정이었다.
앞이 캄캄! 시계 제로라는 말이 실감났다.

그러던 중 한 작은 애완동물전문점(Pet Store)을 소개받아 지난해의 결산보고를 요모 저모 따져 보았으나, 역시 생계 유지가 힘든 상태였다. 괜찮은 비지니스를 내 자금 규모에 맞게 내 놓을 리가 없을 것인데, 그러나 마음은 급하고 신통한 다른 대안이 떠오르지 않는 절박감 속에 막연하고 무식한 평가를 앞세워 밴쿠버에 도착한지 불과 2개월만에 전격적으로 인수하기로 결정하는 만용을 부린다. 그때도 주위의 많은 지인들이 어쩔려고 저러지 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결심한지 두달 후 여러가지 인수절차를 거쳐, 그러니까 이민으로 밴쿠버에 도착한지 만4개월 만에 수중의 모든 것을 털어 넣어 인수하고(이게 바로 올인-All In), 집은 월세(렌트)를 얻어 시작한 밴쿠버의 새로운 삶은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상태로 이렇게 시작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다는 밴쿠버라지만 나와 우리 가족에게는 너무 사치스러운 말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어렸을 때 강아지를 좋아하여 기르던 기억 밖에 없는 애완동물 분야에 문외한인 나는 그때부터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인수한 비지니스에 대하여 조금 아는 분들은 그 점포는 6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는 상황이라는 사실을 얼마 지나서 알게 되었다.

언어 장벽, 문화충격, 전문성 결여 및 소매업 무경험 등 뭐 하나 경쟁력이 없는 상황에서 계속 매출이 뒷걸음질 친 것은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대로 주저 앉을 수도 없고 퇴로도 차단된 남감한 상황에서 마치 배수진을 치고 달려든 결과일까!  6개월만에 매출감소는 멈추고 조금씩 증가세로 돌아서면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하고 한국에서 대학원과 대학을 졸업하고 동반자 자격으로 함께 온 두 아들을 끌어 들여 3부자가 조그만 구멍가게에 매달리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벌린 것이다.

참으로 한심하였지만 스스로 자처한 고난의 길이었으니 누구한테 호소할 길도 없이 온전히 감수하는 수 밖에 없는 이민생활의 서글픔을 곱씹어야 했다. 지금은 두 아들 모두 주류 사회에서 현지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그럭 저럭 1년여가 지났을 때 이건 또 무슨 청천벽력인가! 우리 점포에서 불과 몇블럭 밖에 안 떨어진 대형 쇼핑몰에 소위 빅박스(Big Box)라고 불리우는 35,000SF(약1,000평 남짓) 규모의 뉴욕 증권 시장에 상장되어 있는 미국의 초대형 종합펫샵(PetSmart)이 들어온다는 상세한 계획의 발표를 접하게 된다. 참으로 아연 실색할 일이 벌어진 것이다.

위기를 기회로! 그리고 "밴쿠버 대첩(?)!"

당시 아직도 이 분야(Pet Business)에 대하여 초보자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던 때에,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 전개에 대처할 적당한 대책이 떠오르질 않았다. 무얼 알아야 대책이라는 것을 세울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손 놓고 떠내려 갈 수는 없는 입장,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이 떠 올랐다. 그러니까 위기는 위험과 기회가 동전의 앞뒷면과 같이 분리할 수 없다는 말과도 상통한다.

그리고는 옥포만(해군사관학교)에서 배운, 충무공이 그 절박한 상황에서 대처한 지혜와 슬기를 <오늘 여기>에서 나는 어떻게 써 먹어야 되는가 하고 밤을 지새우며 골몰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절친하게 지내는 한 서양인 친구의 안내를 받아 밴쿠버에서 가까운 워싱턴주 시애틀을 둘러 보러 가게 되었다. 거기서 어느 작은 펫샵이 대형 종합 펫샵 바로 옆 블럭의 위치에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을 자세히 살펴 보고는 무릎을 치고 돌아왔다.

그때 새삼스럽게 자연 생태계를 한번 들여다 보았다. 야생동물의 세계에 대형 맹수들은 나름대로 장점이 있지만 그에 따른 단점도 있기 마련, 마찬가지로 대형업체의 단점을 나의 장점으로 살리고, 소형점포로서 의 장점은 그것대로 활용하면 최소한 살아남기는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그 구체적인 구상에 돌입했다. 무슨 대단한 발견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때는 그것이 나에게는 그렇게 큰 설레임으로 닥아왔다.

나의 내면속에 정립되어 있는 소프트 웨어 즉 밖으로 표출되는 근거가 되는 모든 가치관은 누가 감히 건드리지 못하겠지만, 문제는 하드웨어였다. 말하자면 왜선(일본 군함) 속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며 적선을 격파 하여 왜 수군(일본 해군)의 공포의 대상이었던 충무공의 거북선 같은 것이었다.
그 때 미국에는 새로운 개념의 애견, 애묘용 사료(Dog & Cat Food)가 출시되어 있었다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등급의 원료로 제조된 이 사료는 품질은 좋을지 몰라도 가격이 너무 비싼데다가, 아무도 모르는 무명의 브랜드이기 때문에 소매점에서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을 때였다.

우리 점포에 그 제품도 취급하기로 결심할 때만 해도 그것이 바로 충무공의 거북선같은 역할을 하리라 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가 없었지만, 단지 내가 구상하는 고객들을 대하는 소매업자의 자세에 대한 개념을 실현하는데 적합한 제품으로 판단하고, 남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 브랜드를 취급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당시 그 제품의 지역 총판 담당자는 소매점에 제발 취급만 해 달라고 애원하는 단계였다. 내가 고객을 대하는 주요 컨셉은 모든 비지니스의 평범한 진리인 “고객은 왕이다”의 정신을 어떻게 실현하느냐 였다.

검증되지 않은 신제품을 고객들에게 소개하여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비단 소매업계 뿐 아니라 상식적으로 누구나 다 아는 일!
무명 브랜드를 치열한 열정과 지치지 않는 끈기로 고객들에게 소개하면서 형언할 수 없는 수모와 갈등, 얼굴 뜨거워 지는 경험등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총칼만 없을 뿐이지 그야말로 전쟁같은 처절한 세월을 보낸지 2년, 1999년 여름 어느 날, 나는 그 제품의 미국 제조회사(Natura Pet Products)로 부터 해마다 하와이에서 개최하는 컨벤션에 캐나다 판매왕으로 선발되어 초대받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그런 것은 나하고는 전혀 인연이 없는 피안의 세계, 상상할 수도 없었던 사건(?)이 바로 나에게 벌어진 현실이라는 것을 하와이에 도착하여 더 실감할 수 있었다. 캐나다인으로서는 최초의 수상자란다. 대부분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 선발되어 온 수상자 250여명 중에서 아시아인은 우리 부부가 그 역시 최초라 는 것이었다. 그것도 이제 이민 온지 4년 밖에 안된 새내기가!

그로부터 지금까지 우리 부부는 NPA Hawaii (Natura Prestige Award)에 8회 연속 수상, 캐나다에서 최다 수상자라는 진기록을 갖고 있다. 하여 나는 이것을 자칭 "밴쿠버 대첩!"이라 부른다. 2004년부터는 그 회사의 한국총대리점으로 위촉받아 한국에 수출해 오던 차에 2007년 하와이 NPA대회에는 한국대표 로도 참가해서 드디어 하와이 컨벤션 단상과 비치 올림픽 현장에 우리의 자랑스러운 태극기가 게양되기 에 이르렀다.

내가 살고 있는 밴쿠버의 노스 쇼어(North Shore)라 불리우는 우리 커뮤니티는  캐나다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고장이다. 서쪽 바다에서 흘러들어 온 바다물은 마치 강처럼 좁고 긴 만으로 우리 동네 남쪽을 흘러 동쪽 해안까지 감싸고 있어 메트로 밴쿠버의 중심도시인 바다건너 남쪽의 밴쿠버 시와는 두개의 아름다운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마치 병풍처럼 둘려쳐져 있는 북쪽의 높은 산들은 깊은 계곡과 우거진 숲으로 도시인들의 정서를 어루만져 주고 겨울철엔 스키매니아들에게 매력적인 손길을 내밀고 있다.

서쪽 끝에서 시작하는 <바다에서 하늘까지 고속도로”(Sea to Sky Hwy)>는 유명한 위슬러 스키장으로 가는 길, 하늘과 산과 바다가 만나서 기막힌 조화를 이루며 펼치는 장관은 가히 필설로 표현하기가 궁색하다.

우리 노스 쇼어 커뮤니티에 매주 3회 발행하는 지방 신문이 있다. 캐나다에서 제일 유명한 지방 신문 이란다. 그 지방신문에서 매년 독자들이 뽑는 <소비자 만족상> 제도가 있다. 2003년 드디어 소비자 만족상 에 우리 점포가 뽑혔다. 그리고 금년 2009년 까지 7회 연속 애완동물 용품점에서 최우수 소비자 만족상 을 받았다. 소비자들이 직접 투표하여 뽑는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2005년엔 노스밴쿠버 상공회의소 주최 우수기업상에서 최고의 하이라이트인 Best Business 분야에 대상을 받았다. 지난 10년간 지금 경영하는 경제활동을 통하여 나는 20 여회의 각종 상을 받는 진기록을 수립하고 있다.

이런 작은 노력의 결실인지 2006/2007 미국 헤리티지 인명사전에 등재되는 영광도 누리게 되었다.

3. 에필로그

늦은 나이에 이민이라는 난관을 극복하느라 치열하게 살아 온 보잘 것 없는 모습에 큰 의미를 부여해 준  해군사관학교 총동창회의 <자랑스러운 해사인 상> 심사위원들에게 머리 숙여 깊은 감사를 드린다.

역지사지라는 말이 있다. 50중반이 되도록 해 본적이 없는 소매업, 지난 14년동안 이 일에 종사하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물론 비지니스라는 것이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으면 그 존립 자체가 어렵지만 고객과의 관계에서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있을 때 보다, 내가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해서 나의 고객에게 어떤 유익을 줄것인가"를 먼저 고려하면서 "조화롭게" 운영하면 영리라는 것은 따라 온다는 것이다.

생각하기에 따라 아직도 열댓명의 직원으로 운영하는 소규모 소매업을 하는 주제에 불과하다. 그러나 오늘날 어느 나라나 스몰 비지니스라고 불리우는 소매업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종사하는 중요한 직업이다., "세상 모든 것은 변한다"는 이 사실 이외에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세상의 변화에  슬기롭게 대처하여 살아 남기 위하여는 내 스스로도 끊임없이 변신해야 한다.

400여년전 남해안을 호령하던 충무공 이순신의 고뇌와 그 얼을 우리 해사인들은 옥포만에서 땀흘려 익혔다. 그 정신을 삶의 현장에 되살려 해사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영원의 창인 나의 <오늘 여기>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게 하는 바탕이 되었음을 감사한다. 

이제 내 인생 3막1장의 막을 내릴 때가 된 것 같다.
이 드넓은 땅을 호령할 우리의 후손들에게 우리 말과 글을 잊지 않게 하고, 정원에 피어 있는 무궁화를 더 튼실하게 가꾸며, 거실에는 자랑스러운 태극기를 걸어 놓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3막 2장의 막을 열고 오늘도 덤으로 사는 영원을 향한 각본 없는 내 인생 드라마는 계속된다.

가슴 속에 <진리라는 기준> <영원이라는 잣대> 간직하고----.

4. 후기
(2014년10월 코퀴틀람에 KORNA Pet’s 2호점을 신장 개업할 당시 밴쿠버 중앙일보 기사)

한인 사회 영역 넓힌 KORNA Pet’s  근효 대표

한국에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인구가 2013년 기준, 1천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관련 산업 규모도 2조 원을 돌파했다. 이곳 캐나다에는 반려 동물 숫자와 그 금액을 따지는 것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반려 동물을 키우고 있다. 눈길 가는 곳마다 있는 동물병원, 그리고 PetSmart등 반려동물 물품을 취급하는 대형 몰이 사람들을 끌고 있다. 그만큼 경쟁이 치열하다는 뜻이다. 이민 오기 전 애견관련 사업 경험이 있는 일부 동포들이 애견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지만 반려동물 물품을 취급하는 비즈니스는 주류 사회 몫이었다. 그런데 20 여년 전에 이 사업에 뛰어 들어 지금은 밴쿠버의 대표적인 반려동물 사업체로 키운 교민이 있다. KORNA Pet’s의 배근효 CEO다. 그는 노스 밴쿠버에서 오랜 기간 사업을 했고 트라이 시티(Tri-Cities) 지역 고객들의 요청으로 코퀴틀람에 KORNA Pet’s 2호점을 개설했다. 배 대표를 만나 그의 사업 철학 이야기를 들었다. <편집자 주>

Q> 반려동물(companion animal) 물품 전용 매장은 사실 지금까지 주류 사회의 비즈니스로 알려져 있습니다. 뛰어든 배경, 그리고 무엇보다도 코르나가 점포가 차별성을 갖고 성공한 원인은 무엇일까요.

A>  애완동물은 개와 고양이, 물고기, 새(조류), 햄스터나 토끼 등 스몰 애니멀, 그리고 거북이와 이구아나 등의 파충류 등 6 종류의 동물군이 있습니다. 

제 자신이 개를 좋아하긴 하지만 한국에서 전혀 사업경험이 없이 지난 1995년에 55살의 나이로 늦깎이 이민을 왔습니다. 

한정된 예산에서 스몰 비즈니스를 찾다 보니 노스 밴쿠버 지역에 있던 아주 작은 애완동물 용품점을 인수했습니다. 계속 적자를 면치 못했고 고민 끝에 시애틀에 가서 애완동물 용품 시장을 둘러 본 것이 적자 탈출의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국 해답은 ‘차별성’이었습니다. 

기존 점포처럼 하면 결코 모든 면의 경쟁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 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애완동물에게 좋은 ‘Natural food’였습니다. 

사람에게 ‘먹거리’가 가장 중요하듯이 애완동물에게도 좋은 먹거리가 가장 필요한 것이지요. 미국에서 애견, 애묘들을 위해 <사람먹이 등급의 원료로 사료(Human Grade)>를 만들던 사료제조 업체인 내츄라 펫(Natura Pet Products) 제품을 취급할 수 있었고, 생고기로 만든 냉동사료를 위해 북미주 최초로 대형 냉동고인 워크 인 프리져(Walk-In Freezer) 시설을 갖추었습니다. 

그 이후 입소문을 타면서 사업이 성장했고,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했다는 공적을 인정받아 노스 밴쿠버 상공회의소가 수여하는 Best Business분야의 대상 등 여러가지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Q>  사업을 하시면서 어려움도 많았을 같은데,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요.

A>  사람들은 먹거리를 사러 갈 때 자신이 선호하는 브랜드를 미리 정하고 그것을 사곤 합니다. 그런데 애완동물들의 먹거리는 좀 다른 면도 있습니다. 

평소의 버릇대로 구입하기도 하지만 출시되어 있는 종류가 많다 보니 애완동물 주인들은  “어떤 것이 좋은지’, ‘ 또 자신의 애견이 지금 상태가 이러이러한데 어떤 것을 추천해 줄 수 있는지’를 묻는 고객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애완동물 관련된 지식이 없어 수많은 애로를 겪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올바른 지식과 정보가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그 이후 많은 자료를 찾아 공부를 해 지금은 거의 ‘반 수의사’ 수준으로 상담을 해 주곤 합니다. 

정확한 지식과 정보로 상담을 하니 고객들 신뢰도 쌓이고, 저절로 단골이 생기게 되더군요. 대부분 사업이 그러 하듯이 ‘살아 있는 생명’인 애완동물 관련 사업도 끊임없이 공부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Q> 노스 밴쿠버에 있는 본점이 되고 있지만, 다른 점포를 내는 것이 결코 쉽지 만은 않은데, 이곳 코퀴틀람에 KORNA Pet’s 2호점을 개설한 배경은 ?

A>  버나비, 코퀴틀람 지역에 있는 일부 고객들이 노스 밴쿠버까지 찾아  오곤 했습니다. 너무 멀다는 의견도 많아 고객 편의를 위해 이곳 트라이시티 지역에 2호점(5천 스퀘어 피트/ 150 평 규모)을 내게 된 것입니다. 

이곳에는 유리창이 15개인 워크 인 프리져(대형냉동고)를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애견 웰빙센터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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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근효 대표는 일찌기 해군 사관학교를 나왔다. 바다 사나이다. 예편 후에도 대형 유조선 선장을 했다. 그는 스스로를 ‘무엇에 골몰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라고 말했다. 그 같은 프로정신이 오늘날 KORNA Pet’s를 성공시킨 배경이다. 밴쿠버 한인 사회의 사업 영역을 한 단계 넓힌 배 대표는 요새 ‘건강한 먹거리’와 ‘체질’의 상관관계에 푹 빠져 있다. 그 자신이 힘들어 했던 건강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여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실천하고 있다. 그는 언제든지 교민들이 요청하면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전해 줄 계획이다.(밴쿠버 중앙일보 천세익 기자)

**KORNA Pet’s 새로운 도전 3호점**


<메트로 밴쿠버>는 주변21개의 크고 작은 도시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 캡틴 밴쿠버의 이름을 따서 이곳 최초의 도시인 밴쿠버시(City of Vancouver)는 명실공히 오늘날 메트로 밴쿠버의 중심도시로 성장해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밴쿠버 시는 크게는 서부와 동부지역으로 나누지만 다시 세부적으로는 역사적으로 각기 지역을 불리는 동네 이름이 있는데1970년대 들어서면서 소위 여피족이라 불리는 부유한 엘리트층이 정착하면서 밴쿠버 서부지역의 한 고급주택가의 하나로 변모한 <키칠라노(Kitsilano)>라 불리는 커뮤니티가 있다.

저 유명한 키칠라노 비치(Kitsilano Beach)의 남쪽 지역을 일컫는데 밴쿠버 다운타운에서 서남쪽으로 바라보이는 이 지역은 West 4th Ave. 와 West Broadway라는 두개의 주요한 상권을 이루고 있으며, 활기찬 다양한 소매업종, 여러가지 레스토랑과 카페 등 밴쿠버 서부지역 주민들의 소비생활의 중심을 이루는 지역이다.

2017년 6월 이 키칠라노 지역의 중심부인 West Broadway에 KORNA Pet’s의 3호점을 신장개업하는 계약을 성사시켰고 그 준비를 시작했다.

밴쿠버 서부지역 주민들의 정서에 어울리는 캐나다 최고의 신개념의 웰빙 펫샵을 제공하기 위하여 오는 11월 말까지는 그랜드 오프닝을 한다는 목표로 KORNA Pet’s의 새로운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