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 리
필 리: Feed the People
“많이 먹어” 가장 일반적인 한국인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늘 하는 말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필이라고 합니다.
나는 웨스턴과 핀치에서 태어나고 어린 시절의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놀이터 위에서 자랐다. 많은 한국인들이 70년대 그들의 디아스포라를 만들어 가던 첫번째 지역 중의 하나인 제인과 핀치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이다. 20대의 한국인 청년들 한 무리가 캐나다에서 새로운 삶을 찾으려는 희망 속에 각자 그들의 집을 떠나 새롭게 정착한 이곳을 한국인들은 리버티 빌리지라고 불렀다.
이 성장해가는 커뮤니티 안에도 어느덧 특정한 한국 물품에 대한 필요가 생겼다. 아직도 어렸을 때 처음으로 했던 김치용 배추와 무 수확이 기억난다. 우리의 부모님들은 고춧가루와 양념들을 섞을 수 있는 큰 통들을 가지고 함께 모였었다. 그리고 밤에는 라밧50과 크라운 로열의 취기로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깊은 밤 언젠가 들려 올 트럭의 주차 소리를 기다리면서 고향의 노래들을 드럼으로 치곤 했다. 이 트럭들은 세인트 캐서린에 트랙을 둔 초기의 한국인 농장원들을 실어주고 그 트럭들에 배추, 무, 마늘 그리고 지역 수퍼마켓에서 구할 수 없는 그들이 이 새 땅에서 경작한 무엇이든 실어서 가져왔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겨울나눔을 위한 물건 값을 두고 실랑이를 벌리는 우리 부모님들 옆에 서 있었다. 남자들은 마치 힘있는 개미들이 그 날의 전리품을 운반하는 것처럼 자랑스럽게 가방과 박스들을 우리들 각자의 둥지로 가져갔다. 나도 자랑스럽게 하나를 들고, Osh Kosh로 움직였다.
이것이 나의 한국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변화가 있었다. 나는 이 지역의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온 많은 사람들과 함께 성장했다. 음식을 나누면서 서로의 문화적인 경계는 부드럽고 흐릿해 졌다. 나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맛은 우리 어머니가 현재도 자랑스러워 하는 처음으로 일을 시작했던 이탈리안 공장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그녀의 새로운 이름은 수정에서 수지가 되었다. 그리고 현재도 어머니는 여전히 한국-이탈리언-영어 액센트를 가지고 있다. 어머니가 “Piii-lip o’ Pooouhl - whatcha matta with you - closa da lights”.라고 말할 때마다 내 친구들은 항상 미소를 지었었다.
우리 어머니의 동료들은 내가 공장에 들를 때마다 집에서 만든 모짜렐라 볼이나 소세지 그리고 소스가 있는 빵을 들려주고 부끄러움 없이 모두 먹어버리는 나를 인종이 다름에도 모든 부모의 기쁨으로 쳐다봤다.
사람들을 먹이는 일은 인종의 경계를 부드럽게 해준다.
우리 가족은 미미코로 이사 했다가 나중에 렉데일에서 나의 성장기를 끝마쳤다. 이 긴 여행은 폴란드인, 인디안, 에티오피안, 소말리안 그리고 나의 형제들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서인도와 카리브해 지역의 음식을 알려주었다. 소고기 패티는 나의 새로운 찐빵이었고 닭고기 저크와 염소 커리는 새로운 종류의 매운 치킨이고 한국 찌개였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너그러움과 자부심의 한국 요리 수업은 한국계 캐네디언 교회의 교육을 통해서였다. 여기서 나는 사람들을 먹이는 일에 대한 마음가짐과 나누고 가까워지고 가르치는 일의 기쁨을 배웠다. 한국인 부모님들이 주일 날 오후 예배 식사를 위해 부억에서 지칠줄 모르고 봉사한 이야기는 어디에나 있다. 이것은, 그들이 각자의 직장에서 오랜 시간 일하고 난 뒤에 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센테니얼 공원 에토비콕의 서쪽 끝에서 열리는 도시 간 한국 교회 축구 시합 참가를 위한 연례 교회 소풍들도 있었다. (남자들은 몇백명의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 의무적으로 불을 피우고 엄청난 양의 한국식 소갈비나 고등어를 구웠다.)
요리는 사람들이 다른 이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확히 전달하고 느낌을 표현 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것은 사람들을 무장해제 시키고 가장 중요하게는 자기 자신을 무장해제 시킨다.
나는 초기 이민 세대와 그 아이들은 우리의 음식에 대한 발견과 재 발견을 통해 이 곳 캐나다에서 커뮤니티를 만들고 그 안에서 재미있게 함께 하며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날에는, 크리스티에서 부터 노스욕까지 많은 한국인과 비 한국인들은 기쁜일이 있을 때나 슬픈 일이 있을 때나 늘 그곳에 나란히 서서 손을 맞잡고, 식기들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함께 음식을 나눈다.
한국계 캐네디언으로서, 나는 음식은 나누고 다른 사람들을 먹일 때 항상 더 좋다는 것을 배웠다. 그것은 또 우리가 함께 식사하는 사람에 대한 이해와 나눔의 시각을 가지게 하며 우리의 색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게 한다. 왜냐면 우리의 색은 그것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이기 떄문이다.
한국계 캐네디언 2세로서 맛을 통해 나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항상 나의 자부심이자 기쁨이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