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겸 박사
김원겸 박사: 우리의 할아버지이자 아버지
김원겸 박사는 한인 사회와 캐나다 사회를 소중히 생각했던 한국계 캐나다 시민이자 지역 사회의 훌륭한 지도자였다.
그의 많은 수상 기록들과 업적 가운데 그는 엘리자베스 다이아몬드 주빌리 메달(2012)을 받았으며, 캐나다 노인정무장관 의해 선정된 41명의 모범적인 캐나다 senior (2010) 중 한 명으로 뽑혔다.
김 박사는 1929 년 5남 2녀 중 넷째로 북한의 시골 지역 (갑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898 년생이며 어머니는1904 년생이다. 그의 아버지는 신용 조합의 최고 경영자였다. 그의 부모님은 꾸준히 지역 사회에 봉사하면서 자녀들에게 최대한의 행복, 사랑 그리고 시간을 바쳤다.
2 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한국은 남한과 북한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북한은 러시아 군에 점령되어 공산 국가가 되었다. 남한은 미군에 의한 연합군에 점령되었고 민주 국가가 되었다. 당시 북한의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많은 시위가 있었다.
김 박사는 북한에서 탈출하여 3.8선을 건너 1947 년 한국 서울로 이주했다. 그의 나이 겨우 16 살 이였다. 그는 부모와 형제들과 헤어지게 되었다. 제2 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서울에 온 일본의 대학생이었던 두 형들과 그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와 두 형들은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김 박사는 월세로 살았던 방 한 칸에 있던 책상이 너무 작아 학업을 위해 자정까지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었어야 했다. 학부모의 재정 지원 없이는 학교에 다니기가 매우 어려웠지만 김 박사는 서울 고등학교를 다니고 장학금을 받으며 서울 대학교를 다녔다. 그들이 경험 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장 큰형은 (B.Kim)은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둘째 형 (J. Kim)은 1959 년 존F. 케네디 대통령과 만나 한국의 경제의 미래를 의논했던 유명한 변호사가 되었다.
서울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김 박사는 우수한 식물학 교수를 만났다. 그는 "삶의 기원" 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당시 한국은 내전 중이었지만 그는 식물 생화학 학사를 무사히 마쳤다. 그 후로 석사 과정과 박사 과정을 마쳤고 서울 대학교에서 26 세의 나이에 가장 어린 강사로 임명됐다.
1957 년 김 박사는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서 재정 지원을 받으며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곳에서John Couch and Victor Greulach 박사들과 함께 호흡, 아미노산 함량 및 조류의 DNA에 대한 성장 물질의 영향에 대한 연구를 했다.
1959 년, 박사 학위 논문 발표 후 노스캐롤라이나 Vance Barron 목사의 주례와 식물학 및 동물학과의 교수들 및 친구들의 축복 아래 김윤덕 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김윤덕 교수는 생리학 그리고 생화학을 공부하고 캐나다 오타와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녀는 나중에 암 환자들을 위한 골수 이식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1961 년 김 박사는 미국에서 연구를 계속하려고 했지만 불행히도, 그는 학생 비자가 아닌 정부 비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미국을 떠나야만 했다. 김 박사는 캐나다 오타와에 있는 국립 연구위원회 (NRC)에 연구를 지원했고 수락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NRC의 많은 훌륭한 연구자들을 만나 엄청난 지식을 얻었다. 그는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내란 직후 한국에는 연구기관들이 없었다.
1963 년 김 박사는 토론토 대학의 연구원으로 Tony Bidwell 박사와 함께 일했다. 그는 방사성 물질 연구와 분자 기술에 관한 최신 연구를 진행했다.
1965 년에는 위니펙으로 이주한 후 50 년을 살았다. 그는 캐나다 농업 연구소 (Agriculture Canada Research Center)에서 분자 유전학 과학자 그리고 매니토바 대학 미생물학 및 식물학 부서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미생물 유전학 및 생명 공학 분야의 개척자로서 캐나다와 미국의 농부이 키운 작물을 위협하는 밀 녹과 같은 질병을 조사했다. 녹조 포자는 미국과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매니토바로 번지면서 그는 이 질병에 저항성이 있는 작물을 만들기 위해 밀과 보리 유전자의 녹 저항에 대한 분자 마커를 연구했다. 그의 연구는 농민뿐만 아니라 매니토바 경제에 큰 도움이 되었다.
김 박사는 한국과 여러 나라들 (일본, 중국, 폴란드, 독일, 호주 등)의 많은 과학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그의 연구실로 데리고 왔다. 김 박사는 또한 여러 번 한국을 방문하여 워크숍과 강연을 하고 차세대 한국 과학자를 육성하는데 힘썼다.
1970 년 5 월 14 일, 김 박사와 그의 아내는 위니펙 센 테니얼 콘서트홀에서 열린 특별 시민권 선서식에서 캐나다 시민이 되었으며 선서식 후 매니토바 민속 예술위원회 (Manitoba Folk and Arts Council) 주최, 콘서트가 진행되었다. 또한, Robert Stanbury 연방 장관이 그의 시민권을 증정하기 위해 오타와에서 위니펙을 방문하였다.
1993 년에 그는 한국과 캐나다 사이의 양자 간 교류 프로그램인 한인 캐나다 생명공학 시포지엄 (Korean Canadian Biotechnology Symposium)을 조직하여 캐나다 국립 연구위원회 (National Research Council of Canada)와 한국 과학 기술 연구원의 지원을 받아 12 명의 유명한 캐나다 교수와 연구자들이 한국의 대학 및 연구 기관을 방문, 워크숍 및 심포지엄에 참가하였다. 김 박사는 또한 다른 과학자들과 교육, 멘토링 및 협력하기 위해 캐나다와 전 세계를 다녔다. 그는 미국, 한국, 일본, 독일, 호주에서 다양한 강연에 초대받았다.
1981 년 김 박사는 일본의 교환 교수로 초청되다. 그는 수많은 대학을 방문하여 그의 연구에 대한 강의를 하였고 그의 부모님과 재결합할 수 있는 날을 그리며 남북의 통일을 기다렸다. UN 대사는 적십자사가 그 일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여전히 북한과 남한은 분단 국가로 남아있다.
1990 년 독일 아헨 대학 (Aachen University)의 객원 교수로 초청받았으며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8 차 국제 바이러스 학회 (International Virology Congress)에 참석하였다. 그는 수 많은 강의를 하였다.
그의 연구 외에도 김 박사는 위니펙 지역 사회의 리더였다. 그는 매니토바 한인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새로 온 한인 이민자들에게 영어와 캐나다 문화를 가르치며 봉사하였고 특히 캐나다에서 인권과 다문화주의의 평등을 확장하는데 노력하였다. 그는 또한 캐나다 한인회 총연합회 회장직 (1989-1991)을 맡았으며 1973 년 위니펙에 있는 한글학교 창립자이기도 하다. 캐나다 최초의 한국어 학교였으며 비영리 단체로 등록되어 있다. 그의 목표는 한국계 캐나다 어린이들에게 한국의 역사와 언어를 가르치고, 언어를 통해 철학, 민속 문화에 연결하고 캐나다 사회와 세계 공동체에 기여하도록 격려하는 것이었다. 1982 년 매니토바 한인회 회장을 역임 한 김 박사는 제2 차 한인 사회 콘퍼런스 - 캐나다 한글 학교 프로그램을 조직하여 한인 사회의 모든 지도자들이 연방 정부의 다문화 지원금을 통하여 위니펙에 초대되었다. 이 지도자들은 나중에 자신의 지역 사회에서 한글 학교를 창설했다. 수년간 그는 캐나다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 지속되는 다문화 축제인 Folklorama 진행 담당자로 봉사하면서 위니펙 주민들과 방문객들에게 한국의 역사, 문화 및 음식을 소개하였다.
후에는 매니토바 아시아 유산 협회 (2002 년 -2015 년) 집행 위원회뿐만 아니라Age and Opportunity 이사회에서 8년 (2000 년 - 2008 년) 동안 봉사하였다. 또한 한인 노인학교 교장과 매니토바 다목적 고령자 센터 (MAMPS)의 회계원으로 활동하였다.
김 박사는 리더였고, 멘토 및 선생님 이였다. 또한 훌륭한 아버지와 할아버지였다. 그의 생애 동안 그는 성실성, 총명함과 관대함을 보여주었다. 북한에 가족과 재회할 수 있기를 소망하였다. 한국 전쟁으로 비극적으로 부모와 헤어졌지만 그는 매일매일 그들을 생각하였고 침대 옆에 사진을 놓아 났다. 김 박사의 동료인 문 박사가 30 년 전에 북한을 방문하였고 김 박사의 부모님이 사망 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집에서 작은 추모식을 진행했다. 추모식을 진행한 가장 큰 이유는 세 자녀에게 한국 가정생활의 전통과 조부모님의 존경심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김 박사는 진정한 한국계 캐나다인으로서 그의 업적은 수많은 세대에 걸쳐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