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리 와트


킬리 와트: 1차 청소년 평화 캠프

할아버지 낼슨 웰이 처음으로 나중에 “ 1차 청소년 평화 캠프” 라고 알려진 프로그램을 위해 한국에 갈 가능성을 언급했을 때 나는 즉시 이에 동의했다. 그것은  중국과 일본사이의 모서리에 위치한 이 작은 나라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서가 아니라  단지 내가 여행을 좋아하고 세계사 공부를 특별히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한국 전쟁에서 싸운 캐나다 군인들에 대해 알아가는 이 여행을 통해 나는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열정 모두를 만족 시킬 수 있었다.

여행은 금방 다가왔고 빠르게 끝나버렸다. 말그대로 눈깜빡 할 사이에 지나갔다. 120명 정도의 청소년들은 부산의 한 해변에서 부터 시작해서 역사적인 거제도 포로 수용소, 왕궁을 지나 버스로 북쪽의 악명높은 비무장지대(DMZ)를 방문하고 서울에서 신나는 쇼핑과 저녁식사까지 정신 없이 이끌려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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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할아버지는 한국에서 복무하셨고, 몇몇 전우들은 끝내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Ralph Roy Murphy가 그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이 젊은 남자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었으며 그가 어디에 묻혔는지도 알려주었다. 나는 평화 캠프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전국 여행을 통해 우리가 방문할 장소 명단에 있는 묘지 이름을 보면서 마음이 설레었었다. 연합국 기념 묘지는 아마도 내가 가 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을 것이다.  그곳에 있다는 것 자체가 정말로 영광스러운 것이었다. 장소가 1950년에서 1953년 사이의 한국 전쟁에서 병사들을 잃은 국가들에 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폭포들과 키가 큰 나무들, 구석 구석 마다 놓여있는 기념비들을 보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경험이었다.  캐네디언 병사들은 꽂과 관목 배경이 있는 그들만의 구역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적당한 크기로 줄지어 있는 묘비들 사이를 오르내리다 익숙한 이름 앞에서 멈추었다. 나와 연결되어있다고 느끼는 한 사람이 마지막으로 묻힌 장소를  보는 것은 굉장히 특별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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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1차 청소년 평화 캠프가 있은지 8년이 지났지만 해마다 한국 정부는 세계여러나라에서 더 많은 참전 군인들의 손자, 손녀들을 일주일 간의 관광과 역사 수업, 자유와 평화를 위해 자신들의 삶을 잃은 이들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한국으로 초청한다. 캐나다의 한국전 기여는 항공기와 기계장비, 8,123명의 병사들만이 아니다. 캐나다는 뿔뿔히 흩어진 가정들에 희망을 주는 것에도 기여했다. 한국에서 나는 예전에는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캐네디언으로 태어난 것에 대한 큰 자부심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한국 투어는 아주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가이드는 캐나다가 한국 전쟁 에서500여명의 군인들을 희생했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 정부가 공동의 선을 위해 함께 싸운 사람들의 자손들에게 계속해서 돌려주기를 원하는 이유이다. 그것은 또 더 발전된 우호적인 관계를 위한 한국 정부의 바람을 대변하는 것이며 후손들이 그들 조상들이 한반도 위에 이룬 타인을 위한 희생을 언제나 기억할 것이라는 약속이다. 대한민국 국가 보훈처 김양 선생님은 우리 캠프를 위한 환영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유엔의 깃발 아래, 캠프에 참여한 여러분들의 조부모님들은 그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멀리 떨어진 작은 나라를 지키자는 부름에 호응해주었습니다.”  그는 또 모든 군인분들이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한국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한국으로 와서 오직 그들의 피와, 노력, 땀과 눈물로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위한 기초를 놓았으며 그들의 숭고한 희생은 헛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Kiely Watt은 현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남편 Rob과 거주하고있으며, 발달장애 아이들을 가르치며 취미로는 여행을 즐겨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