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초 이유식
민초 이유식: 캐나다 건국 150년을 맞이한 한 이민자의 42년의 뒤안길
<불타는 향학열로>
1974년 7월 28일 서울은 영상 32도의 무더운 날씨였다. 습도까지 높아 땀이 등골을 줄줄 흘러 내렸다. 내 나이 34세 주한 캐나다 대사관에서 3번의 우여곡절의 인터뷰 결과로 겨우 이민 비자를 받았다. 임신 3개월의 처와 2살 된 딸과 나 3사람이 가진 것은 미화 600불이었다. 당시 조국은 가난한 나라였기에 정부에서 허락한 돈이 일인당 200불이였다. 공항에 배웅을 나온 친구들 너 이 자식 좋은 직장 팽개치고, 가지 않아도 될 녀석이 왜 떠나느냐고 원망들을 한다. 이는 주한 캐나다 대사관의 이민 허가 담당관의 말과 똑 같다. 주한 캐나다 이민 당당관은 당신은 당신의 나라 대한민국이 필요한 사람이지 캐나다에서는 필요치 않다며 2번의 면접에서 거절을 당했다. 드디어 3번째 면접에서 당신 가는 날부터 후회를 하리라면서 이민 허가를 해 주었다.
3년만 공부를 더 하고 귀국을 하리라는 결심. 어느 누구도 나의 의지를 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언어와 풍습 모든 것이 낯 설은 이국땅에 도착 캘거리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인 동서 김 창영 박사 댁에 여장을 풀었다. 막연하나마 캘거리 대학에서 어떤 일이든 얻고 공부를 하리라는 나의 기대는 그날 여장을 푼 날 저녁 동서로 부터 불가하다는 의견을 듣게 된다. 너무나 이곳을 모르고 잘 살고 있는 나라에 오면 모든 것이 내 뜻대로 해결 되리라는 망상은 물거품으로 사라지고 절망감 속에 하루 이틀이 지나갔다.
600불 전 재산은 이제 남은 것 400불이 되었고 무작정 동서 집에 머물면서 신세를 질 수도 없기에 삼일이 지나면서 부터 좌절감 속에 하루하루를 넘겼다. 우선 생업을 찾아서 가장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 모든 것이 막연했다. 뜻 밖에 고등학교 때의 선배 한분을 만나게 되어 이 선배가 용접공으로 일을 하는 <도미니온 부릿지>라는 철강회사에서 밤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시간당 1불80전의 시간급 노동일을 시작 했다. 나의 일은 용접 후에 남은 용접 쇳물을 그란딩이라는 머신으로 갈아서 매끄럽게 만드는 일이였다. 그란딩하는 용기가 너무 무거워 팔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 속에 2주간의 일을 했다. 세 번째 주일을 시작하는 시간에 옆 좌석에서 일을 하던 영국에서 온 노무자가 공중에서 쇳덩어리를 운반하는 크레인 작동의 부주의로 쇳덩어리가 공중에서 떨어져 옆 사람이 즉사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이날로 이 회사를 그만 두었다. 동서 집에서 나와 방 2개짜리 월세 집으로 이사를 했다. 월세 180불을 지불하고 한달 식품대 전기세 가스세 등을 지급하고 나니 주머니에 남은 것은 80불이였다. 밤이 되면 아내 모르게 이불을 덮어쓰고 울었다. 무작정 울었다. 앞이 막막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울기만 했다. 울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닌데 그저 눈물만 자꾸 흘러 내렸다. 며칠 후 생계유지를 위하여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메데리온 캬비넷> 공장에 취직을 했다. 이 공장은 주로 전기톱으로 나무를 썰어서 책상과 의자 캐비넷 등을 만드는 열악한 중소기업이었다. 여기에서 톱밥가루와 먼지를 먹으며 하루의 노동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시간당 2불50전의 돈으로 겨우 식품대와 월세돈을 지불할 수 있었다.
<새로운 도약을 위하여>
이 캐비넷 공장의 일을 접은 때는 그 해 12월 중순이였다. 이 공장에서 내 일생을 마칠 수는 없기에 내일 일은 내일의 걱정으로 돌리자는 각오로 무작정 일을 그만 두었다. 나이 탓일까 그 때의 나의 용기는 가상하다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한다. 건방진 소리이지만 조국에 있을 때 나는 대한상공회의소 본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래도 엘리트 직장에 다닌다는 자부심에서 생활을 했다. 한국의 명문이라는 고려대학에서 MBA 석사학위를 받은 나에게 인천의 I 대학에서 대학 선배님이 경영공학과에 학과장으로 계셨는데 나에게 시간 강사로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보라는 요청을 해 오셨다. 많은 후배들 중에서 별 볼일 없는 나에게 이런 요청을 하셨음에 너무 감사하여 부족 하지만 대학 강단에 선다는 자부심으로 이에 응하였다. 그 후 나에 대한 어떤 평이 있었는지 신촌의 H 대학에서도 시간 강사자리를 요청하여 2년여 동안 직장을 다니며 대학 강단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내가 이 말을 장황히 설명하는 것은 내가 학생들에게 종강을 할 때에 한 말을 피력하고자 함에 있다. 즉 경영학 원론과 마케팅 두 과목을 맡은 나는 종강을 할 때 꼭 학생들에게 내가 당부하는 말이 있었다. 경영학을 전공하는 목적은 부자가 되고자 함이다. 그런데 부자가 되기 위하여서는 당신들이 사회인이 되었을 때에 할일이 세 가지 인데 그 중 한 가지만 성공해도 괜찮다고 얘기하곤 했다.
첫째는 남자로서 큰 뜻을 품고 나라를 위한 올바른 지도자가 되는 길이다. 둘째, 정치를 할 수 없는 입장이라면 무역을 해서 세계를 주름잡고 외화 획득으로 國富를 축척시키는 일을 하라. 셋째, 첫째, 둘째 일도 할 수 없는 입장이 된다면 부동산업을 하라. 이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만 성공을 하여도 세상에 태어난 보람을 느낄 것이라고 내가 학생들에게 강조 했던 말이었다.
이제 내가 한 말을 나 자신을 위한 결단의 길에 들어서야 할 입장이 되었기에 용기 있게 시간 당 2불50전 짜리 일자리를 팽개쳤다. 아내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날 밤에도 또 이불을 덮어쓰고 혼자서 흐느껴 울고 울었다. 영화의 쿼바디스를 생각하며 내가 갈 길을 생각하며 울고 울었다. 동창이 밝아 오자 결연한 의지로 아내에게 말 했다. “나 직장생활 그만두었소. 그러나 당신 배고프게 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시요” 하며 겉으로는 웃음 지으며 속으로는 절박한 마음을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모르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 해 12월은 몹시도 추웠다. 오늘 부터 행상을 한다는 각오였다. 고등학교 P 선배의 배려로 선배가 가졌던 차를 싼 가격에 살 수 있었지만 휘발유 값이 아깝고 휘발유 넣을 돈이 없기에 그 추운 겨울에 유화 12점을 둘둘 말아서 팔 밑에 끼고 행상 길에 나섰다. 그 혹독한 추위 속에 이 곳 지리도 모르니 얼마나 어려웠을까 그러나 살아야 된다는 의지, 내 식구 배고프게 하지 않게 한다는 용기, 꼭 성공을 하리라는 각오로 이 거리 저 거리 이 가게 저 가게를 찾아다녔다. 엉터리 콩그리시를 하면서. 때로는 내 영어를 못 알아듣는 사람이 못 알아듣겠다 하면 당신이 한국말을 못 알아듣듯이 내가 영어를 잘 할 수는 없다고 설득을 했다.
그림(유화) 12점은 한국에서 화방을 하는 6촌 동생이 “형 행여 이런 그림이 팔릴지?” 어려울 때 한번 시장 개척을 해 보라며 준 선물 이였다. 이 견본이 나의 행상 장사 상품의 시작이 되었다. 조금씩 장사 수완도 늘고 돈도 벌게 되어 동생에게서 좀 더 많은 양의 유화 수입을 했다. 그 후 이 유화 사업은 번창하여 서부 캐나다의 큰 디스트리뷰터가 되었다. 여기에서 벌어들인 재화로 무엇이고 국익이 되고 발전적인 사업이 될 수 있는지 생각을 거듭하며 시장 조사에 임했다. 국익과 내 개인의 생존을 위해 성장 상품이 될 수 있는 물건 수입을 하자는 각오로 중국 상가를 샅샅이 누비며 조사를 했다. 결론은 인삼을 제품으로 만들어서 이 곳 백인 사회에 파고든다는 생각 이였다. 이때만 해도 한국 인삼은 뿌리로 팔렸는데 주로 중국 상가에서 한 박스 당 25불 정도에 팔리고 있었다. 중국 사람들이 삼계탕용으로 뿌리를 사서 먹기에 상품성이 없고 백인들에게는 생소한 상품 이였다. 유화(그림 행상)로 벌어 모은 돈으로 인삼 제품을 만들어서 백인 사회에 파고든다는 생각으로 한국에 나갔다. 이민을 온 후 꼭 일년이 지난 후였다.
제약회사를 물색 했으나 어느 회사이던 신규 사업으로 인삼 뿌리를 제품으로 만들어 주기를 꺼려했다. 나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기에 그 때 면목동에 있는 신풍 제약이라는 회사를 찾아가 장 용택 사장님을 만났다. 사장실에서 캐나다의 인삼시장의 실태를 설명 드리고 인삼 제품을 만들어 달라고 앙청을 했다. 신규 제품의 개발은 새로운 자본을 투자하여 공장 생산라인을 신설 또는 증설하는 문제, 신규 사업의 성공여부 등 회사로서는 어려운 결정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 방문을 했을 때 사장님은 부정적인 의견을 주셨지만 연구를 할 테니 다시 한 번 와 달라는 약속을 받고 일주일 후에 다시 찾아 갔었다. 사장님은 젊은이의 용기와 노력이 가상하다면서 신제품을 개척하고자하는 조국애가 아름답다며 내가 제의한 제품을 견본용으로 만들어서 공급을 해 주시겠다는 말씀을 주셨다. 제품은 파우다, 타불렛으로 시작을 하기로 하고 개인 수표 5천불을 지불을 했더니 웃으시며 이는 수표가 아니고 종이 쪽지라 하신다. 캐나다 은행의 마니오더(Money order)의 수표가 한국의 자기앞 수표와 같은데 마니오더 수표가 아닌 개인 수표로 신제품 개발도 하고 제품을 수입을 하겠다 하니 이 얼마나 엉터리였겠나. 하지만 사장님은 나의 간절한 애원과 살아가고자 하는 노력을 높이 평가하여 한국 인삼을 제품화하여 북미에 판매한다는 나의 간청을 수용해 주셨다.
이렇게 시작한 인삼제품 수입으로 생후 처음으로 북미에 인삼제품을 팔게 되었다고 나는 자랑스러워했다. 그 후 인삼제품을 정식 무역절차로 L/C(Letter of Cridt)를 열고 수입을 계속하며 도소매를 겸한 시장 개척을 해 나갔다. 시장 개척시 절실하게 깨달은 것은 내 매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동안 벌어 모은 돈으로 웨스트 부룩이라는 백화점 뒷면에 위치한 건강 식품점을 매입했다. 이제 내 매장이 있으니 마음대로 도소매를 겸할 수 있었다. 종업원 한사람을 채용을 하고 나는 약국과 건강 식품점을 순회하며 인삼제품 판매에 전력투구했다. 인삼이 좋다는 것은 백인들도 알고 있었기에 인삼제품이 잘 팔렸던 것이었다.
내 가게에 손님이 오면 내가 인삼제품의 효능을 손짓 발짓을 하며 많이 팔았다. 이러다 보니 생약 전문가가 나타났다며 나에 대한 소문이 이 곳 백인 사회에 전파가 되어 나의 인삼제품의 수입은 큰 성공을 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인삼 뿌리로 백인들이 모르던 상품을 제품으로 만들어 팔자 한국의 국위를 높인 일등 공신이 된냥 내 마음은 한 없이 기뻤고 신풍제약의 장 용택 사장님에게 머리 숙여 감사를 드렸다.
여기서 부터 나의 수입 제품은 다양화 된다. 내륙인(Inland) 우리 도시의 입장을 생각 썩지 않고 장기간 보유할 수 있는 소모품 중심으로 팔릴 수 있다고 생각되는 제품 수입을 하기 시작 했다. 예컨데 베이스볼 모자, 가위, 신창, 쇼핑백, 도록(Door Lock) 등 장사가 될 것 같은 상품은 수입을 해 왔다. 그런대로 재미가 있었고 돈도 벌수 있었다. 건강식품을 경영한지 3년째 되던 어느 날 독일인 핼묻이란 사람이 찾아와서 나의 건강식품점을 구입하겠다는 제의를 해 왔다. 처음에는 돈도 잘 벌리고 가게를 매도할 뜻이 없다고 사양을 했었는데 매일 찾아와 나의 가게를 사겠다고 통 사정을 했다. 곰곰이 생각을 하니 만일 이 건강 식품점을 판다면 현재 있는 재고 등을 합하여 3년 만에 내가 손에 잡을 수 있는 현찰 이 50만불이 족히 될 것 같아 이 분에게 가게를 매도했다. 그 시절 50만불의 현찰은 지금으로 2백만불은 족히 되고 남으리라는 생각에서 이 돈으로 좀 더 큰 사업을 시작할 계획 이였다. 가게를 매도하고 공병 수거 장사를 사들였다. 백인 종업원 6명을 채용하고 공병을 모아 놓으면 정부에서 관리하는 회사에서 공병을 가져가고 매 2주마다 대금을 결재 해 주었다. 이 고물장사를 2년여를 한 후 에드몬톤 대학에서 화공학을 전공했다는 백인분이 찾아와 나의 가게를 매입 하겠다 하여 좋은 가격을 받고 팔았다.
공부를 더 하겠다고 온 내가 이제 완전히 장사꾼이 되었다. 그 때의 나의 현실은 첫째도 둘째도 생업 이였다. 처음 이 땅에 도착했을 때 나의 처는 임신 3개월 이였는데 지금의 둘째 딸 경아를 얻었다. 4살 된 첫딸과 2살이 되어가는 딸을 돌보기도 힘든 아내에게 밖에 나가 돈을 벌어서 내 공부 뒷바라지를 해 달라고 할 수가 없기에 공부한다는 것을 완전히 접었다. 공부를 하려다 이렇듯 장사꾼이 되기로 결정을 하고 그저 무엇인가 분하고 억울하고 세상살이가 원망스러워 또 몇 며칠을 두문불출을 하고 울고 울었다. 처절한 나 자신을 어떻게 추수를 수 없었으나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이 때 장사꾼이 된 후 몇년 후에 대학원 논문지도 교수님이시던 나의 은사님이 격려차 이곳을 찾아 오셨다. 내가 고생하면서 살아온 지난 수년간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장사꾼이 된 이 못난 제자를 꾸짖어 달라고 충고를 구했다. 지금 대한민국학술원 부회장이신 나의 은사님은 박사를 해도 그 보다 더 나은 업적을 얻었다 해도 생업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고 격려를 하시며 나의 호를 民草로 지어 주셨다. 이 말은 사람의 풀잎으로 살아가라. 겨울에는 모든 초목이 죽은 듯 하지만 봄이 되면 다시 모든 초목이 다 살아나지 않느냐 당신의 지금의 고통을 겨울로 생각하고 반드시 봄이 온다는 것을 잊지 말고 사람의 풀로 살아나라는 말씀을 주셨다. 그리고 공부가 인생에 전부가 아님을 강조를 하시며 나에게 큰 용기를 주셨다. 이 후에도 은사님은 나를 격려코자 2번을 더 이 먼 길을 찾아 주셨다
벌써 은사님과 나와의 사제지간의 정을 나눈 햇수가 47년이란 세월이 되었고 지금도 귀국을 하면 일년에 두번씩은 찾아뵙고 은사님은 인생살이에 대한 지도와 격려를 해 주시고 계신다. 이런 존경할 수 있는 은사님이 나에게 있다는 것은 나에게 가장 큰 행복이고 자랑이라는 생각을 여기에 밝히고 싶다.
다시 화제를 바꾸어서 그 시절 한인 사회에서는 어떤 한인이 구멍가게를 열어서 장사가 잘되면 그 옆에 다른 한인이 와서 똑 같은 식품점을 함으로 기존에서 상권을 가지고 돈 좀 벌어들이던 식품점도 망하고 새로 오픈한 식품점도 망하는 예가 많았다. 나 혼자 생각에 같은 한인들 끼리 서로 뜯어 먹는 장사는 하지 말아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이 도시 밖에서 한인들끼리 경쟁을 하지 않을 장사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이 도시 밖에서 사업을 할 사업장을 찾아 나섰다. 몇 달을 찾아다닌 결과 이 시에서 한 시간 반이 걸리는 조그마한 타운 그라남(Granam) 이라는 곳의 슈퍼마켓을 사 들였다. 백인 종업원 7명을 채용한 1만8천SQ FT의 큰 매장이였다. 식품을 도소매를 하는 디스카운트 마켓으로 일주일에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5일간 일을 하고 일요일과 월요일은 마켓 문을 열지 않는 지방에서 소문난 마켓을 3십5만불에 매입을 하고 이곳에서 3년여 동한 자취를 하면서 장사를 했다. 이 마켓은 매일 1만5천불에서 2만불의 매상을 올리게 되어 정말 돈이 주머니 속에 쌓여가는 것을 느꼈다.
<피 눈물을 흘리며 모함과 수모의 넝쿨에서 몸부림을 치다>
지금까지 잘 나가던 나에게 악재가 왔다. 3년여를 가족과 떨어져 자취를 하다가 보니 몸도 마음도 지쳤다. 이에 이 슈퍼마켓을 팔려하니 50만불의 오퍼가 왔었다. 그런데 50만불이라는 거금을 지불하려는 사람들은 전액의 돈 없이 매입 하고자 하는 분들이 많았다. 30만불만 선금으로 지불을 하고 상가 주인이 잔액 2십만불을 이자를 받으며 3년 혹은 5년 후에 받는 조건의 오퍼였다. 이 이자 즉 이곳에서 상거래에 적용되는 (Vendor Take Back) 을 해 달라는 구입 요청 이였다. 그러나 생판 모르는 백인들에게 이렇게 사업체를 넘기고 싶지 않아 한인들이 매입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 P 라는 분이 자기 가족이 부인을 포함 일을 할 수 있는 자녀가 4 사람이 있으니 자기에게 기회를 달라고 사정을 해 왔다. 대구가 고향이라 봉화 두메산골이 내 고향이니 같은 경북 사람이기에 안심을 하고 정말 좋은 조건으로 사업체를 넘겼다. 조건은 3만5천불이 이 P 라는 분이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이라 사정을 하기에 고향분 한분을 돕는다는 생각에서 3만5천불을 받고 거기에 30만불을 3년간의 이자를 지불함과 동시에 4십만불 원금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판매를 했다. 그런데 이분이 사업체를 인수하면서 오퍼래이팅 비용이 없다하여 타운의 은행에서 10만불을 코 싸인을 해주면서 사업체 경영에 도움을 주었다. 그 후 3달간 이 마켓에서 판매에 대한 진실과 마켓 경영을 가르쳐주면서 같이 근무를 했다. 이 3개월 동안 이 P 라는 분은 못 만져보던 거금을 매일 손에 지니 정신이 없이 좋아 하는 듯 했다. 3개월간 경영에 대한 나의 모든 지식을 가르쳐 주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내 생각에는 나는 혼자서 백인 종업원 6, 7명을 고용하면서 상가를 운영해서 짭짤하게 돈을 벌었으니 이 분의 경우 노동력이 6명이나 되니 나 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 들이이라는 생각을 했다. 6명 가족이 다 일을 하지 않고 부부만 일을 해도 많은 돈을 저축 하리라는 나 대로의 판단은 일년 후에 회한과 눈물과 모함으로 얼룩진 잘못된 판단으로 막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10만불 코 싸인을 해 준 것도 내가 다 떠안고 이 사람의 빚도 내가 갚아야 되는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항상 쌓여있던 재고품 20여만불은 10여만불로 줄어들고 나머지 10여만불은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리고는 정부에 파산신고를 내고 도망을 가고 말았다. 그 뿐만 아니라 나는 교회를 나가지 않기에 신앙심을 잘 모른다. 이 분이 도망을 가면서 이곳에서 제일 큰 교회에 나가 이 유식이 한테 사기를 맞아서 모든 것 다 잃고 이 도시에서 살수 없어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간다면서 떠났다. 그 때의 이 참담한 심정 어떻게 글로 표현하랴 동포사회에 나를 사기꾼으로 악담과 모함을 퍼뜨리고 이곳을 떠난 것이다. 이 때 내가 이분에게 받은 금전적 손실은 어마 어마했으며 나의 정신적 타격은 글자 그대로 내 영혼은 완전히 멘붕 상태로 자살까지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딸린 가족들 아내와 어린 3남매를 생각하니 그럴 수도 없었다. 이에 다시 마음의 정리를 했다. 교회 집사라는 분의 삶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교인들의 생존이 얼마나 불쌍하게 생각되는지 다시 한번 내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물고 다시 일어서자는 각오로 이 마켓을 다시 맡아 경영을 했다. 1년여 후에 이 분이 갚지 않고 남겨 놓은 은행 빚 10만불을 다 갚았다. 그리고 이 마켓을 세를 주고 집으로 돌아 왔다. 그 때의 나의 좌절감은 같은 동족에 대한 배신감, 두번 다시 같은 동족과는 어떤 금전거래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내 마음을 正道, 正心, 正刻 세 단어를 가슴에 품고 정리를 하며 다시 재기의 길에 나섰다.
다행히 이 슈퍼마켓을 경영하면서 벌어들인 재화로 이 도시의 중심가와 넘버원 도로 선상에 있는 건물 3개를 저렴하게 사들였었고 그 후 30년 후에 호텔을 개발코자 한땅을 세입자를 안고 이 건물을 사들인 것과 26가구가 살아갈 수 있는 아파트를 매입한 것이 있기에 슈퍼마켓에서 잃었던 것을 새로 매입한 6개의 빌딩과 이 마켓과 사무실 건물을 중심으로 다시 도약의 길을 걸었다. 이 재화는 무역에서 벌어 축적했던 재화와 공병장사에 벌어서 저축했던 재화 그리고 이 슈퍼마켓에서 벌었던 재화로 시간만 나면 부동산 매입에 열중한 덕분 이였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 사나이로 태어나 큰 꿈을 가져라 정치와 무역을 못 하다면 부동산을 하라는 나의 종강 때의 주장을 지금 내가 시행케 된 것이다.
이때부터 재택으로 부동산을 사고파는 부동산 업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해가 바뀌어 갈 때 마다 나의 회사의 자산은 증가되었다. 이는 지금은 여기에 안계시지만 로얄 트러스트 (Royal Trust)라는 신용금고 회사의 메니져 버트 볼이라는 사람이 나를 아주 잘 본 덕분 이였다. 백만불짜리 상가건물을 십만불만 지불을 하면 9십만불은 모게지를 주었다. 이분이 나를 잘 보게 된 원인은 신용과 성실성 때문이라는 말을 하셨다. 해마다 건물 하나씩 구입을 했는데 이 분은 나 만 만나면 너 또 돈 얻으러 왔느냐며 껄껄 웃으며 두말 없이 모게지 돈을 주었다. 나는 한번도 실수 없이 계약된 내용대로 이자나 원금 등을 지불을 했다. 오늘의 나를 있게 만든 고마운 분이시다. 지금 밥술이나 먹으니 찾아뵙고 따뜻이 식사대접이나 하고 싶으나 은퇴를 해서 BC주 어디에선가 살고 계신다는데 찾을 길이 없다. 어쨌든 나의 부동산 투자는 큰 실수 없이 성장기에는 76명의 세입자가 입주해 있는 빌딩과 아파트, 주택 등 많은 건물들의 소유주가 되었다.
경영학에서 중요한 내용 중 투자보수율이라는 이론이 있다. 쉽게 말해서 투자에 대한 손익이 어떻게 나오냐를 말 함이다. 나는 이 때 학문에서 배운 투자보수율 이론을 생각했다. 즉 인푸트(INPUT)가 있으면 아웃푸트(OUTPUT)가 있어야 한다는 이론이다. 내 나이도 60이 가까워오고 이제는 투자만 할 것이 아니라 투자를 한 재화에 대한 결실을 얻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하나 하나 간직하고 싶지 않는 부동산 부터 처분을 하고 이 처분된 재화로 땅에다가 투자하는 전략을 세우게 된다. 땅에 투자를 함은 셋돈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투자액 전액이 현찰이 있어야 한다. 이때부터 건물 위주의 투자에서 땅을 중심으로 하는 투자 패턴으로 바꾸어 나갔다. 은퇴를 해도 은행 빚 걱정을 하지 않고 땅을 소유하겠다는 나의 계획은 적중을 했다. 그 후 인근 도시 등을 중심으로 총26만평의 땅을 사들였다. 이 중 판매를 해서 매수 금액의 4배의 이익금을 내고 60여만불의 잉여세를 낸 적도 있었다. 현재도 이 시의 인근 발전의 여지가 충분한 지역에 23만평의 은행빚이 없는 땅을 소유하고 있다. 은행 빚이 없기에 걱정되는 일은 별로 없고 세월이 흐르면서 경기 회복에 따라 상당한 현찰을 손에 잡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위에서 언급한 다운타운의 호텔 건설을 위한 개발허가를 얻고 이 프로젝트를 처분코자 했으나 경기의 둔화로 판매를 할 수가 없어 많은 고심을 했었다. 205개의 객실에 20층의 건물을 지어 올린다는 처음 나의 계획이 경기의 불황으로 직접 건설한다는 것은 포기를 한 것이다. 이 호텔 프로젝트을 판매코자 했더니 여러개의 오퍼가 왔었으나 은행에서 건축을 위한 모게지를 주지 않아 여러번 계약이 성사가 되지 않았다. 이에 년전에 알버터 정부의 후원하에 믿을 수 있는 대형 건설회사에서 매입코자 하기에 주겠다는 아주 저렴한 가격을 그대로 수용을 하고 팔아 치웠다. 내 나이가 60만 되었어도 도전을 하련만 이제 고희를 훨씬 넘긴 나이기에 우리 가족과 내 인생의 황혼기도 좀더 즐기며 여유로운 생존을 하고 싶은 욕망 때문 이였다.
<동포 사회를 위한 봉사 활동>
34살에 이방인이 되어서 동포사회의 현실도 잘 숙지하지 못했고 더구나 캐나다라는 나라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었다. 그저 내 식구 배고프게 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생업에 전념을 한 나에게 이 곳 한인사회에서 몇몇 인사들이 뜻 밖의 제안을 해 왔다. 한인 동포라야해야 겨우 4, 5백명정도인데 누구나 돌아가면서 이 지역의 한인회장일을 해야 하니 동포사회를 위하여 일을 좀 하라는 의견 이였다. 지금이나 그 때에나 조국애 동포애에 불타던 나는 이 제안들을 거절치 못하고 이 곳 동포사회에서 역대 회장 중 제일 젊은 나이인 38세에 이 곳 제12대 한인회장으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 후 동포사회의 일에 점점 빠져들 때인 1979 년도에 박 정희 대통령님의 사위이시던 한 병기 주 캐나다 한국대사님이 나에게 전화가 왔다 (한 병기 대사님은 얼마전 작고하셨음). “이 회장 우리 캐나다 한인 동포들을 대표로할 수 있는 조직이 없으니 캐나다 전교민을 대표로 하는 단체를 만들어야 되지 않겠오.” 이 회장이 서부캐나다를 중심으로 애를 좀 써 주면 좋겠다는 제안이셨다. 그 후 오타와에서 캐나다 전역의 회장들이 모여 캐나다한인 총연합회를 발족을 했다. 총연을 설립하기 위한 회칙 초안은 토론토의 강 신봉 회장, 몬트리올의 박 동렬 장군(해병대 예비역 소장) 오타와의 유 태호 박사, 오타와 한인회장 정 종식 박사와 캘거리의 이 유식이 서부캐나다를 대표 하여 회칙 초안을 작성 총회에서 인준을 받게 된다. 1980년대 초반 영‧불어에 능통한 오타와의 유 태호 박사가 유엔의 유네스코 파리 담당관으로 전임을 하게 된다. 초대 총연회장이 공석이 됨으로 제2대회장으로 제일 큰 도시인 토론토의 강 신봉 회장이 총연회장으로 승계를 하고 이 때 나는 타의에 의하여 부회장으로 선임이 된다. 이어 3대회장에 토론토의 초대 한인회장을 역임을 했던 윤 여화 회장이 3대 회장으로 선출이되고 뜻 밖에 이 부족한 몸이 총연 이사장으로 선출이 되었다. 윤 여화 회장의 임기가 끝이나고 제4대회장으로 몬트리올의 오 기송 박사가 승계를 했다. 이어 오 기송 회장의 임기가 끝이 나고 5대에 내가 총연회장으로 선임이 되었다. 다른 모든 과정은 생략하고 5대 총연회장이 되었기에 나에 대한 선임 과정만 간단히 소개를 하고자 한다.
토론토에서 개최된 총연 총회에서 내가 총연 회장이 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않은 이변 이였다. 지금까지 4대를 동부에서 총연회장을 배출 했으니 이제는 서부 캐나다의 차례라는 의견이 지배적 이였다. 이에 선거일 하루전에 루이지아나 대학 교수이던 권 오율 박사가 서부 캐나다 회원들을 긴급히 소집하여 권 오율 박사의 의견에 따른다는 동의하에 서부 캐나다회원 중 한분을 총회에서 입후보하도록 한다는 의견이 채택되었다. 정말 능력도 준비도 없는 나에게 전 회원의 만장일치로 그 다음날 총회에서 제가 서부 캐나다를 대표하여 총연회장에 입후보 하게 되었다. 투표결과 동부캐나다의 전회원이 나에게 투표를 해 왔다. 선거 결과는 밴쿠버에서 입후보한 다른 한분은 2표에 그쳤고 참석회원 98프로의 지지로 5대 회장에 선임이 되었다. 이 때 전국의 캐나다 동포는 약 25만명이 좀 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나로서는 무거운 책무감에 짓눌렸지만 어쨌든 맡은 일이니 대의명분있는 일과 사명감을 가지고 조국과 동포사회의 길잡이가 되겠다며 심혈을 기울여 일을 했다. 중요한 일 몇가지만 정리를 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금까지 창립 회원 중심으로 움직이던 총연을 각 지역 회장 중심으로 거듭나는 총연을 만들고자 지역회장님들을 캘거리로 초청 임시총회를 열어 회칙을 바꾸었다. 이 조치는 명실공히 한인을 대표로하는 토대의 일환이었다. 둘째, 오타와 소수민족협의회에 적극 참여하여 이민 쿼터를 18만명에서 22만명으로 증가하는데 연방정부 설득에 앞장을 섰고 그 결과 우리 뜻대로 이민 쿼터수를 증가 시켰다. 셋째, 해외한인 동포들을 한 울타리에 묶는 단체를 만들었다. 이는 일본 거류민단장 박 병헌씨와 미주 총연회장인 조 도식씨 및 제가 1987년 봄 서울 워커힐 호텔에서 회합을 갖고 박 병헌 단장의 헌신적인 희생과 노력으로 그 해 11월 일본 도교 신죽구 미야꼬 호텔에서 해외동포 대표 700여명이 모여 해외한민족대표자 협의회를 창립했다. 이때 회장에는 박 병헌씨와 5인 부회장의 한사람으로 본인도 선출이 되었다. 한민족 대표자 협의회에서는 교민청 설립을해 줄 것을 끊임없이 정부에 건의를 했었다. 그러나 중국 동포들의 국적 문제 등의 난제로 교민청 대신에 재외동포재단을 설립 하게 된다. 한민족 대표자협의회는 회칙에 의하여 부회장은 당연직 상임운영위원이 되어 모국의 동포재단이 설립되기 전 까지 미국 하와이, 프랑스 파리, 독일 베를린, 미국 워싱톤, 캐나다 밴쿠버, 일본 도교 등에서 상임운영위 원회를 개최하고 해외 동포 700만의 나아갈 길과 조국 통일에 일조를 할 수있는 사업을 위한 꾸준한 토론을 가졌었다. 넷째, 캐나다 동포 경제의 활성화를 위하여 대한항공을 캐나다로 취항케 하는데 일조를 했다. 내용은 이렇다. 일본에서 한민족대표자회의 회의를 마친 우리 캐나다 대표단은 모국을 방문 대한항공 조 중훈 회장을 찾아뵙고 대한항공이 캐나다에 취항을 해야만 캐나다 동포들이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역설을 했다. 우리의 노력의 결과일까 한국‧캐나다 양국정부의 협조로 다음해에 대한항공이 캐나다에 취항을 하게 되었다. 조 중훈 회장은 캐나다 총연을 잊지 않고 총연의 노력에 감사한다는 감사장을 보내어 왔다. 뒷이야기 이지만 우리 총연 회장단은 그 때 연방정부 교통장관이던 돈 메리진스키를 3번이나 방문해서 대한항공 취항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 한인들은 보수당에 한표도 찍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던 기억이 새롭다. 그외 총연으로 수행했던 소소한 일은 말 할 수 없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예컨데, 한‧캐 경제 세미나개최 뉴픈랜드 세인트 존스 주청에서 개최했으며 이 때 영 불어에 능통한 한국의 고려대 경영대학원 원장 김 동기 박사님께서 초청되어 기조 연설을 하셨다. 또한 소수민족 범죄예방을 위한 세미나, 소수민족 노인 복지 향상을 위한 세미나. 소수민족 유대강화를 위한 세미나, 등등 실로 헤아릴 수 없는 회의와 세미나에 참석을 했다. 이 중요한 회의는 2달 간격으로 내 재임 기간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경제적으로 지금과 같이 여유롭지 않았지만 나는 각종 세미나에 한번도 불참을 한적도 없었고 내가 주재하는 세미나도 내용과 명분이 뚜렷하기에 온갖 희생을 하면서 성공적으로 개최 했었다.
그 후 해외 한민족대표자협의회도 모국의 동포재단에 넘겨주고 일선에서 700만 동포들의 권익을 찾던 인걸들도 한 사람 한 사람 사라졌다. 창립을 한 박 병헌 회장은 10여년전에 작고를 했다. 또한 미주 총연회장 조 도식 씨는 동포사회의 일에 환멸을 느껴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었는데 요사이는 소식을 모른다. 이 유식 본인의 생활 철학도 바뀌어 60이 넘으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조용히 삶의 보람을 찾는 일에 전념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 꼭 밝히고 싶은 말은 이 많은 동포사회의 일을 하면서 내 한번도 내가 무엇을 하겠다고 손을 들고 한 적은 없었다. 언제나 타인의 추천에 의한 표 경쟁의 선거결과의 산물로 직책을 맡아 최선을 다해 봉사와 희생을 했었음과 그리고 이 유식이가 명분있고 보람찬 일을 많이 했다는 말을 듣고 있음이 보람찬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위에서 밝혔듯 60이 넘으면 한인사회의 어떤 공직도 맡지 않는다는 나의 생활 철학을 실천하면서 동포사회의 조직활동에 일체 나가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그리하여 60이 넘어서도 보람찬 삶을 살기 위해 찾은 길이 시인이 되는 길이였다.
이 후 7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또한 캐나다 중앙일보의 김 효 회장이 글을 써 달라며 나에게 논설위원이라는 직함을 주어 12여년간 캐나다 데일리 신문에 썼던 글을 모아 「캐나다를 알자」라는 책을 출판을 했다. 이 칼럼집이 조국에서 널리 읽혀져 많은 동포들이 이 책을 읽고 이 곳으로 이민을 와서 나에게 전화를 해 주셨다. 이 영향일까 모국의 통일문화진흥회의라는 단체에서 나에게 서부 캐나다 회장직을 맡아 달라 해서 몇 번 사양하다가 하는 수 없이 수락한 일도 있었다.
한가지 꼭 밝혀두고 싶은 일은 한반도통일연구회의 이사로 일을 한 사실이다. 이 단체는 해외 원로 한인사회지도자 50명이 주축이 되어 만든 단체로서 캐나다에서는 동부의 정 영섭 박사(몬트리올대학 명예교수) 중부의 박 찬웅씨(민주사회건설협의회 회장) 서부에 이 유식(시인, 전 총연회장)이 3명이 동부, 중부,서부를 대표로 이 모임에 참석 오스트리아 빈 등에 모여 남북의 통일에 가교역할을 하고자 심혈을 기울여 왔음을 여기에서 밝혀둔다. 나의 한인 동포들을 위한 노력도 1994년에 모든 것을 "끝으로 마감을 했다. 1987년부터 1989년까지 캐나다한인총연합회 회장직을 맡아서 일을 하며 많은 고뇌 속에 우리 민족의 장단점과 DNA를 나름대로 공부를 할 수 있었음은 내 인생에 큰 마음의 양식이 되었다고 서슴없이 밝히고 싶다. 나의 경험으로는 동포사회의 지도자가 되기 위한 조건은 첫째,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야 하며 둘째, 정신적인 여유가 있어야하고 셋째,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열심히 맡은 바 일을 잘 할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한민족의 정체성의 영원 지속을 위하여 민초해외문학상 제정 운영>
위에서도 한 두번 언급을 했듯이 내 나이 60 이 되면 조용히 내가 살아온 삶을 돌이켜 보며 있는듯 없는듯 살아가리라는 나대로의 생활 철학을 실천코자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서 용솟음치는 조국애와 동포애는 식을 줄을 모르는 활화산이 되고 있다. 이에 무엇인가 내 역량 껏 조국과 동포들을 위하여 티끌이라도 남겨보자는 일념이 나의 호를 딴 민초해외 문학상의 제정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민초해외문학상을 설립하기 전에는 내 소유의 땅 코그래안(Cocharne)의 땅에 코리아가든을 만들어 우리민족의 전통문화를 보급할까하는 생각과 민초문학관을 만들어 해외의 우리 동포들이 찾아 줄 안식처를 만들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한국문단의 원로이신 시조 시인의 대가이신 조 성국 시인이 이곳에 자기의 아드님을 찾아오셨다. 그 시절 이 시의 동포들을 위하여 이곳에 문인협회를 창립하고 문협회장직을 5년째 하고 있을 때였다. 조 성국 시인님이 우연한 기회에 나를 알고 전화가 와서 우리는 만남의 기회를 가졌다. 그 때 내 마음의 진솔한 의견을 표출하였더니 조 시인님이 며칠을 생각하셨다가 다시 전화가 왔다. 민초 시인 내 생각인데 한국가든이던 문학관이던 이를 운영하자면 많은 애로사항이 따를 것이고 자식들에게 많은 부담을 줄 것인데 행여 시집도 여러권 상재 했으니 문학상을 제정함이 어떻소 하는 의견을 주셨다. 나도 며칠을 생각다가 나의 내자와 자식들을 다 불러모아 놓고 내 뜻을 전하고 의견을 물었다. 나의 아들 하나 딸 둘은 대 찬성이었다. 아버지 인생을 멋지고 행복하고 보람차게 살아가시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라며 전부가 찬성이었다. 나아가 나의 자식들은 우리는 아버지에게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다며 아버지가 이런 고귀한 뜻을 지녔음에 기쁨이 있다고 말하였다. 나의 내자는 일찍이 나의 뜻에 찬동을 하였기에 그저 실수없이 잘 운영하여 후세들에게 누를 끼치지 말았으면 좋겠다 했다. 이렇게 전 가족이 합의를 한 것이 2006년 이였다.
그 후 2007년 나의 제 4번째 시집을 출간을 하고 출판 기념 파티에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100여명의 동포 하객들 앞에서 민초해외문학상 제정에 대한 나의 뜻을 밝혔는데 벌서 10년을 맞이하여 금년 2017년에 10회상의 수상자를 배출하게 되었다.
9회까지의 수상자와 문학상 심사위원장님들을 여기에 간단히 소개 한다. 또한 금년 10회상의 시상식은 내가 42년간 둥지를 틀고 살아온 나의 제2의 조국 캐나다 캘거리 시에서 조촐한 시상식을 가질 예정이다. 나대로의 생각은 문학상은 첫째, 수상자의 작품성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둘째는 심사를 하는 심사위원장이 얼마나 권위가 있는 선비인가 남들이 보기에 객관적 타당성이 있는 심사평을 했는가. 셋째, 시상식을 얼마나 뜻 있고 보람차게 시행 했는가. 이 세가지 점을 항시 생각하면서 한해 한해 문학상을 운영해 왔다.
여기에 나대로의 심사기준을 설명한다면 수상자가 얼마나 조국과 동포사회를 위하여 기여해 왔는가, 또한 수상자가 수상을 통해 동포사회 앞날에 얼마만큼 기여할 것인가 등을 설정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수상자가 살아온 생활이 얼마나 건실했으며 올바르게 진실된 삶을 살아 왔는가하는 측면서 항시 엿 보게 되었음을 밝혀 본다.
수많은 사람들의 문학상의 상금과 운영비용에 대한 관심을 표해 오기에 여기에 간단히 밝혀 둔다. 처음 문학상을 시작할 때에는 수상상금이 3천불 이였다. 5회까지 이렇게 집행된 후 6회부터는 수상금을 5천불로 증가했으며 그외 시상식 비용과 기타 운영경비는 매년 2만불을 소요하고 있다. 수상금을 좀 더 올리고자 하나 자문위원회에서 수상금 올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강조를 한다. 바람이 있다면 계속해서 문학상을 운영함이 중요함을 강조를 한다. 내 자신의 사재를 사용하기에 제정적인 어려움과 부족함도 있지만 나름대로 조국과 동포사회를 위한 일에 헌신한다는 자부심도 있기에 그저 다른 바람은 없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난 후이라도 이 유식이라는 시인이 한민족의 정체성 고양과 정서함양을 돋우는데 일조를 했다는 것으로 각인이 될 수 있다면 나에게는 큰 영광이 되리라는 마음뿐이다.
<민초해외문학상 9회까지의 수상자와 심사위원 명단>
제1회 수상자는 캐나다의 변 창섭 시인, (심사위원장, 임 헌영 박사, 한국문학평론가 협회회장)
시상식 캐나다 캘거리 시
제2회 수상자는 중국의 조 룡남 시인 (대상)과 김 미화 시인 (차상), (심사위원장, 임 헌영 박사 한국평론가협회 회장 시상식 중국 연길)
제3회 수상자는 캐나다의 이 동렬 박사 수필,(심사위원장, 김 봉군 박사, 케토록대학 문과대학장)
시상식을 캐나다 토론토에서 가질 예정 이였으나 수상자의 건강 문제로 취소하였음)
제4회 수상자는 미국의 배 정웅 시인 (심사위원장, 김 봉군 박사, 케토록대학 문과대학장 평론가협회 회장) 미국 로스앤젤레스 의 한인경영호텔
제5회 수상자는 독일의 전 성준 소설가( 김 유조 박사, 건국대학 부총장)
시상식 독일 프랑크푸르트 한인 식당
제6회 수상자는 캐나다의 강 미영 시인, (심사위원장, 유 안진 박사 한국예술원회원, 서울대 명예교수)
시상식 :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 20층
제7회수상자는 러시아의 엄 넬리 박사 수필 (심사위원장, 유 안진 박사 한국예술원회원 서울대 명예교수) 시상식 : 러시아 모스코바 한인고려회관
제8회 수상자는 부라질의 안 경자 소설 (심사위원장, 정 종명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시상식 ; 브라질 상파울로에서 가질 계획이던 시상식은 지카병의 확산으로 다음기회로 미루었음)
제9회 수상자는 몽골 인문대학 강 외산 교수 소설 (심사위원장, 김 종해 박사 한국평론가 협회 회장)
시상식 :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몽골 한인식당
제10회 수상자 미정 (2017년 8월 15일 발표예정 (심사위원장, 신 경림 시인 전 한국작가협회 이사장)
시상식 : 캐나다, 캘거리 한인회관 예정
이상과 같이 현재까지의 문학상 운영현황과 매회 수상자 등을 발표했는데 제가 문학상을 제정 시행하고 있음은 첫째,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이민 2-3세 나아가 영원히 한민족의 억만년 대계의 뿌리를 지키려함이고, 둘째 우리 민족의 5천년 역사의 전통문화를 영원히 승계 보존함에 일조를 하고자 함이며, 셋째 재외 750만 동포의 정서함양과 민족정신을 고취함에 일조를 하고 싶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하겠다. 특히 2017년에는 조국의 재외동포재단에서 나의 문학상 운영에 대한 내용을 재외동포재단 저널지에 널리 기사화를 해 주셨음에 나름대로 큰 뜻이 있다는 생각을 하며 동포재단에 감사를 드린다.
다음은 작년 2016년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가졌던 제 9회민초해외문상상 시상식 관계의 영상 기사를 여기에 올려 본다. 이 영상외에 각 나라에서 가졌던 시상식 화보 등 영상이 많으나 지면상 생략을 하며 참고로 몽골 수상식 영상 한편을 발표함을 양지하시기를 바란다.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2016 제9회 캐나다 민초해외문학상 대상 시상식 열려
(http://blog.koreadaily.com/alexoidov/973657) 몽골 방문 캐나다 민초 해외 문학상(賞) 이유식 회장, 캐나다 복귀 귀로에 올라 (http://blog.koreadaily.com/alexoidov/974017)
<조국의 KBS 제일방송에 3번 출연 대담과 캘거리 한인방송국 Gust 초대석 출연 대담 중 최근 캘거리 한인 방송국 출연 대담 내용만 여기에 상재해 본다>
1. CKYR RED FM 106.7 Mhz 한인라디오방송에서 오늘 스튜디오에 특별한 게스트를 모셨습니다.
며칠전 몽골 울란바트로에서 제 9회 민초 해외 문학상 수여식을 성대히 마치시고 오신 민초 이유식회장님을 모시고 오늘 청취자 분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마련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민초 회장님, 오랜만에 뵙는데요, 며칠전 캘거리에 돌아오셨다고 하는데, 여독은 좀 풀리셨는지요?
답 : 예 안녕하십니까 먼저 다른 중요한 프로그램이 많으실텐데 저를 위한 귀한 시간을 내어주셔신전 아나 국장님을 비롯 방송제작에 임하는 여러분들께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아시다 싶히 이제는 나이도 있고 먼길 여행에는 많은 부담감이 있는 것 같고 아직 시차관계로다소의 불편함은 있으나 견딜만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2. 민초해외 문학상을 매해 9년간 개최하고 계신데요, 아직 민초 해외문학상에 대한 취지나 성격에 대해 생소하신 청취자분들을 위해서 설명 부탁드립니다.
답 : 네 참 세월이 빠르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처음 시작을 할 때에는 우리 해외동포님들이 다 방면으로 훌륭한 활동을 하고 또한 많은 업적을 쌓고 있지만 우리의 정서함양이나 민족백년대계를 위한 정체성의 지속발전과 고양을 위함에는 별 관심을 가지시는 분들이 없어 무엇인가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남길 만한 일이 없을까하는 저 나름대로의 생각이 민초해외문학상을 제정하게 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제정을 하고 처음 시작할 때에는 동포사랑 조국사랑에 일조를 하자는 일념으로 밀어부치자는 생각이었는데 한해 한해 축적이되어 9회의 시상식을 성황리에 마치고 나니 감회가 깊으며 그 동안 세계 각지의 동포님들의 성원과 격려에 이 기회를 통하여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여담이지만 캐나다 동포들로부터 격려의 메일을 받았을 때 정말 해외동포들이 얼마나 정서에 메말라하며 조국과 동포들을 사랑하는 가를 느꼈는데 많은 분들의 격려로 저로 하여금 어떤 사명감 같은 것을 느끼게 하드군요 웃음)
3. 이번 9회 민초 해외문학상 수상자는 몽골에서 활발하게 한국인으로서 큰 활약을 하시는 분이 선정되셨다고 하는데요, 수상자 소개와 더불어 작품소개도 부탁드립니다.
답 : 이번에 수상을 하신분은 몽골 인문대학교 한국어 학과 교수님이신 강 외산 교수 입니다. 강 교수는 몇년전에 응모를 했었으니 이번이 두번째의 응모 입니다. 기실 두번 세번까지 응모하신 분들이 있지만 이분의 응모의 변이 참 뜻이 있는 듯 했습니다. 즉 두번째 응모를 하면서 몽골은 북미를 재외한 유럽과 아시아를 재패한 강국이였습니다.그러나 지금 몽골은 아시아에도 유럽에도 속하지 않는 어정쩡한 나라 입니다. 몽골이란 나라에서 밥줄을 달고있는 사람으로 몽골을 위한 정체성을 확립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표출 해 왔습니다. 이 이야기는 길기에 생략을 하고요 이번의 응모작은 소설 3편과 수필 16편이였습니다. 그 중 대표 소설 몽골에 담덕이 있었네를 소개코자 합니다. 이 소설의 요점은 담덕 즉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중국 천지를 점령하고 한국인의 위상을 떨친 것과 현재 몽골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인동포님들을 담덕 즉 광개토대왕의 아호를 인용한 소설 이였습니다. 담덕과 같은 한인들이 몽골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절절히 표현한 소설로서 앞으로 우리 동포들이 몽골에서의 활약상을 기대코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한 마디 첨언을 한다면 27일 낮 시간의 여유가 있어 몽골 대학 3학년 한국어학과 학생들에 대한 특강을 요청받고 60분간 학생들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저의 생각은 몽골 학생들의 순수한 마음, 정열, 미래를 위한 도전, 현재의 자기 나라의 빈곤, 등에 대하여 많은 고심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으며 학생들의 청강태도는 너무 진지하여 지금도 학생들 한사람 한사람의 영롱한 눈동자가 저의 뇌리에 남아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4. 시상식에, 훌륭한 분들이 많이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주셨다고 하는데요, 행사에 참여하신 분들은 주로 몽골 한인동포분들이 많이 함께 하셨는지요?
답 : 네 주로 몽골한인동포들로서 현지에서 활약하고 있는 각 단체장과 한국에서 오신 업체 대표등 100여명이 초대되었 습니다. 특히 저의 뇌리에 남는 것은 김 일성 종합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주 북한 대사직을 마치고 몽골로 귀국 다시 주 한국 대사직을 수행하고 현재 한 몽골 교류협회장 <페 우르진룬데브> 씨의 축사가 저의 심금을 울려 주었습니다. 이분의 축사 내용은 우리 몽골이 가난 한 것은 몽골 민족은 이 유식 시인과 같이 몽골민족의 백년대계를 위한 정체성 확립을 위하는 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한국이 잘 살고 있는 것은 한국민족은 이 유식 시인과 같이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라는 축사였습니다. 이 축사를 들으며 저 자신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게 했습니다. 또한 주 몽골 캐나다 대사 <에드 제이거>의 축사였습니다 미스터 제이거의 축사는 자기가 대사직을 수행하면서 캐나다의 대사로서 캐나디안이라는 것이 이렇듯 자랑스러운 적이 없다는 과찬의 말씀이 였습니다. 주 몽골 오 송 한국대사는 부친상을 입으시고 귀국을 했다가 시상식 하루 후에 몽골로 귀국 저녁 만찬을 베풀어주시며 격려를 해 주셨습니다. 오 송 한국대사의 매너와 활약상은 이 분같은 분이 어이 큰 나라의 대사가 되지 않고 몽골이라는 적은 나라에 계시는가 하고 의아함이 있었습니다. 참 훌륭하신 분이라는 인상 이였습니다. 그외 몽골 한인동포님들이 열심히 살아가시는 모습이 자랑 스러웠습니다.
5. 이쯤에서 민초 이회장님이 추천해 주시는 노래 듣고 잠시 쉬어가겠습니다. 같이 하고 싶으신 노래 소개 직접 부탁드립니다.
답 : 아이고 제가 좋아하는 노래까지 들려주신다니 감사 합니다.
들어도 들어도 실증이 나지 않는 노래 정 훈희님의 꽃 밭에서를 듣고 싶은데 가능할지요. 저를 아시는 모든 분들과 같이 듣고 싶습니다.
6. 네, 노래 잘 들었습니다. 내년에는 민초 해외문학상이 제 10회째를 맞이하는데요, 10 주년 기념의 해라서 다른 해 보다 뜻깊은 수상식이 될거로 예상되는데요, 개최국가는 미리 정하셨는지, 또한, 어떤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답 :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참 세월이 빠른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저의 제이의 고향인 이 곳 캘거리에서 10회상 시상식을 뜻 깊게 개최하고픈 마음 입니다. 많은 성원을 앙청드리며 첨언을 한다면 고향이 어디냐를 생각케 합니다. 언젠가 제가 말씀드렸지만 조국의 영원한 민족 시인 고은 님께 제가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고은 시인님은 저에게 말하기를 죽는 곳이 고향이라 말씀하시며 고향에 너무 연연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유교 사상과 교육 속에 성장한 사람이기에 저의 죽음과 고향에 관하여 항시 심도 있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이번 조국 방문길에 저의 조상님들의 가족묘지를 만들어주신 지관님께 제가 묻힐 자리를 찾아달라 했었습니다. 조국 어디엔가 저의 유골을 묻을 묘지를 찾아 달라 했습니다. 필요하다면 조그마한 산을 제가 사 들이겠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이 지관 말씀 이 선생 그 무슨 당치 않는 말이냐며 반대를 하드군요. 이유인즉 자식들이 있는 곳에 묻히는 것이 정답이라 했습니다. 저의 생각은 저 한몸 흙으로 돌아가니 자식들을 위하여 풍수에 좋은 곳에 묻히고 싶다했더니 자식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자식들 곁에 묻히는 것이 정답이라 하더이다. 이 말씀을 들으니 자식이 있는 곳이 고향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7. 요새 캘거리, 알버타 경기가 많이 침체되서 많은 사람들이 정말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요, 민초회장님께서는 오래전부터 부동산 투자를 많이 하신걸로 들었는데, 부동산 경기는 어떠신지요?(부동산 전망?)
답 : 제가 이 곳의 경기변화를 어이 예측을 하오리까마는 현재의 알버터 주의 경기는 장기침체의 늪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이는 미국이 원유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변하면서 사우디가 이에 대한 압력으로 원유가를 저렴하게 팔고있고 더구나 러시아에 잠재되어있는 원유도 소화할 길이 없지요. 이런 악재 속에 우리 알버터는 원유에 대체할 산업이 없는 것이 큰 문제일 것 같아요. 앞으로도 장기간 불황이 계속될 것 같아 걱정 입니다. 부동산 경기도 전체의 경제 흐름에 따라 변동이 심하리라 생각이 드는데 앞으로 자기의 분수에 맞게 가정 경제를 융통성 있게 운영해야 되리라는 생각입니다. 방송에 의하면 캐나디안 반이상이 집 모게지와 기타 생계에 적자운영을 하고있다하니 앞으로 이 현상이 지속되면 캐나다 경제의 대 재앙 현상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이는 앵겔 계수를 낮추는 길 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 입니다. 현찰이 있으면 축척을 하면 앞으로는 좀더 좋은 바이어스 시장이 되리라 생각을 합니다. 아나 국장도 돈 꼭꼭 숨겨두었다가 좋은 투자처 나오면 투자토록 하세요 웃음.
8. 내년 민초 해외문학상 수상을 목표로 지원하시는 분들이 참고할 수 있는 시상기준에 대한 정보 부탁드립니다.
답 : 내년에는 북미에서 응모를 받을 계획 입니다. 특별한 기준은 없고 제가 항상 주장하는 것은 첫째 응모작품의 우수성 둘째 민족 백년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있을까 하는 작품. 셋째 응모자의 인간됨됨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얼마나 건전하고 정직했으며 올바르게 살아왔는가. 넷째 응모자가 앞으로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얼마나 헌신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생존의 철학을 가졌는가 등등을 생각 합니다. 심사는 언제나 조국의 명 선비님들이 맡으셨으니 심사하시는 분들의 심사에 저는 일체 관여를 하지 않으며 어디까지나 객관타당성있고 최고의 권위있는 문학상으로 거듭 나게 하는 것이 저의 꿈 입니다. 유럽이나 중국 동포들은 저의 문학상이 해외 700만동포들에게 노벨 문학상이라고 오래전 부터 불려오고 있다함에 송구스러움을 느끼고 있는데 이번 몽골에서도 여러 동포님들이 민초해외문학상은 해외동포들에게는 노벨문학상이라는 말씀들을 해서 몸둘바를 몰랐습니다. 그저 웃읍시다.
9. 이제 올해도 한달 조금 더 남았는데요, 올해를 보내시면서 아쉬운 부분이나 내년에 소망하시는 특별한 일들이 있으신지요?
답 : 지난날을 뒤적이면 회한뿐이지요. 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살이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자리를 빌어 한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이번 조국 방문길에 제가 가장 존경하는 선비 중 선비님이신 경남 진주의 3대 천재라는 k 교수님과 식사를 나누면서 한 말입니다. K 교수님은 K대학에서 문과대학장을 역임하시고 한국문단의 거목이시지요. K 명예 교수님은 저에게 물었습니다. 이 시인 우리 국민들의 장점은 생략하고 국민들이 모르는 3가지 단점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장점은 수 없이 많지만 단점을 물으시니 제가 평소에 잘 생각해 보지 않았기에 답을 못드렸더니 K 교수님은 저에게 정말 명쾌한 답을 주었습니다. 첫째, 우리 국민은 우리가 얼마나 잘 살고있는지를 모르며 민주주의를 외치며 권리는 주장을 하나 대개의 국민들은 의무 수행을 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 둘째, 북한이 얼마나 못 살고 악독한 정권이며 사람을 무참히 학살하는지를 모르며 자유와 인권이 말살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점 셋째, 가까운 일본을 왜놈이라 비하하지만 일본이 얼마나 민주주의를 숭앙하며 법을 잘 지키는 문화민족이며 애국하는 민족임을 모른다는 점을 이야기 하더군요. 이 말씀 공감을 하시는지요. 저는 저 자신에게 이 말씀을 묻고 있습니다. 아나 국장은 어떻게 생각을 하시는지요.
끝으로 이해를 보내며 제가 존경하는 동포재위님들께 한마디 간곡한 부탁 말씀을 드리고 싶은 이스라엘 민족의 금언이 있습니다. 첫째,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누구냐 하면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우면서 살아가는 것이며, 둘째 가장 강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자기가 자기와 싸워서 이기는 사람이고 셋째, 가장 부유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 할 줄 아는 사람이라 함을 잊지 마시기를 바라는 마음 입니다.새해에는 우리 캐나다 동포들을 포함 조국의 7천만 한민족이 하나 되어 부강한 나라로 발전되기를 기원드리고 있습니다.
10. 몽골행사 마치시고 한국일정 보고 오신지 며칠 안되셔서 많이 피곤하실텐데요, 오늘 한인라디오 방송 게스트 초대석에 응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민초 이유식 회장님, 더욱 건강해 지셔서 후세에 멋진 일, 더 많은 업적 남겨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답 : 따뜻한 성원에 감사드리며 캘거리 래드 에프멤 방송의 발전을 축원 드립니다. 장시간 귀한 시간 할애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맺는말 /고희를 훨 넘긴 내 생존의 기쁨과 슬픔의 빛깔>
내 생존의 빛깔을 더듬어 본다. 조국에서 34년 제2의 조국 캐나다에서 42년을 살았다. 이 글을 쓰면서 뒤 돌아보니 그저 허무하고 한스러움 뿐이다. 도대체 무엇을 하면서 이 나이만큼 살아왔는가를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나의 조국 어머니의 품안 배고픔에서 벗어날려는 그 바람과 흙 먼지 속에서 34년을 살았어도 내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조국애와 동포애를 한번이라도 잊은 적이 있었던가. 나름대로 알량한 시인이기에 여기에 대구신문과 한통문진 등 여러 신문과 월간지에 좋은 시로 선정 발표되었던 시 한수로 나의 조국애를 피력해 본다.
<나의 조국>
아침 햇살 /밝혀주던 새 떼들 /석양을 향해 날개 짓을 했다
허공 속에 뿌리내리던 억새풀 /하루 해 저물어가는 /불협화음의 난타
꽃도 피고 세월도 가고 /천차만별의 화음 /이래도 저래도 좋은
나의 조국 /좋은 나라 /오 ! 대한민국 /대한민국
짧막한 4연의 시로 나의 제 1의 조국을 진솔히 피력했다면 작일 나의 제2의 조국 캐나다를 생각하며 현존하는 나의 생존의 시를 피력해 본다. 기실 나의 제2의 조국인 캐나다는 내가 세계를 나름대로 많은 나라를 여행도 해보고 각 나라의 국민들의 삶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을 나름대로 캐나다와 비교를 해 보았다. 이에 캐나다는 세계에서 제일 살기 좋은 나라라는 것을 생각하며 내가 이 땅에서 42년간 생존해왔고 나의 자손이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케 된 것을 감사에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나의 시는 내 생존의 빛깔 못다 이룬 하고 싶은 일들 좀 더 뜻 있는 일을 못하고 살아온 회한을 담은 작품들이다.
<허수아비 시인의 향기 >
바람따라 은은한 바람의 향기가 불어오고 사람의 마음따라 사람의 향기 불어 세상을 덮는다.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더러운 냄새도 있고 달콤한 향내도 풍겨온다.
마치 장미꽃과 같은 향기도 있고 가을에 물들어가는 단풍잎과 같은 향기도 있다.
연두빛 나뭇잎 솟아나는 오솔길에서 울고있는 매미울음 소리 같은 향기도 있고
연륜은 불타고 반딧불도 반짝이는 뒷방 노인의 향기도 있다.
오늘은 천년을 살고 천년을 죽어서도 살아간다는 허깨비 나무에 올라 사람들을 본다.
어딘지 모르게 희노애락의 향기가 용암으로 흘러 바다를 만들고 있고
그 심해에서 살아가는 물고기 떼들이 허깨비 나무를 조롱 한다.
너와 나의 향기는 매 마찬가지인데 지구 속에 살아남은 티끌은
희망의 눈물이고 절망의 꽃으로 어머니의 자궁 속을 배회하는 사랑이 있다.
나만이 간작한 희열을 나만의 고독을 자랑하며 석양 노을 위에서 서커스를 한다.
사람냄새가 구더기가 되고 파리 떼들이 뿌려놓은 애벌레가 찌린 오물이 악순환을 거듭한다.
혼란과 나만의 독선과 이기는 어느 민족의 유전자 (DNA)자학의 울음이다
발전은 악화가 양화를 탄생하는 그레샴의 법칙이 생존을 난자 한다.
그 달콤한 향기에 취한 병든 사회는 꽃으로 피어나 자화자찬 속에 위선의 꽃을 피운다.
제 잘난 멋에 살아가는 나의 동공은 참 더럽고 아니꼬운 향기의 사회다.
어쩔 수 없는 원죄의 환성은 요단강을 건너가고
그 속에서 사회의 정의와 진실은 꽃을 피우고 그 향기에 취해서 춤을 추는 허명의 악랄한 위선
나는 오늘도 너와 나를 보며 그저 울고 울어본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사라고 시를 쓴다.
내 시를 좋아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허수아비가 시를 쓴다.
시래기 된장국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다.
돼지고기 수육에 소주를 마시는데 취하지 않는다.
오늘은 <마리아 라이나 릴케>가 사랑했던 <루 살로메>의 인간적인 참 인간적인 생존을 음미한다.
첫 사랑의 상처를 안고 한평생 시를 쓰다가 세상을 떠난 <에머리 디킨슨>을 그려본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어느 것도 택할 수 없는 허수아비의 시
그 시는 바보의 절규이며 위선의 횡포로 메아리치며 허공을 날고
새 떼들이 창공에서 울고 있다.(2017.06, 11)
이제 나는 지난날의 살아온 삶을 정리하면서 나름대로 삶의 변을 남기고 싶다. 지난 날 조국의 여러 출판사와 월간 문예지 등에서 나의 캐나다 이민의 역사를 고료를 지불할 테니 글로 써 남기자는 제의가 있었지만 실로 진실된 마음으로 내가 살아온 길이 너무나 어렵고 힘들었기에 사양에 사양을 해 왔다. 그러나 이번 연방정부 상원의원실의 연아 마틴의 요청을 묵살할 수 없어 나의 지나온 삶을 살펴보는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이 글이 해외 동포750만명 중 한 사람에게라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끝으로 살아오면서 내 삶에 못 잊을 분들 몇분을 여기에 소개하면서 끝을 맺고자 한다. 현재까지 47년간 사제지간의 알뜰한 정을 맺고 있는 나의 고려대학 경영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지도 교수 은사님 이시고 현 대한민국학술원 부회장인 김 동기 박사님, 대학 선배님으로 그 많은 후배들 중 나를 발탁하여 대학 강단에 서게 해준 송 문익 박사님, 캐나다 일간 중앙일보 김 효 회장님 김 효 회장님은 지방에 살고 있는 이 허접스러운 사람에게 논설위원이란 직책을 주고 십수년간 글을 쓰게 해 주신 분. 또한 지금은 작고를한 에드몬톤의 유 인형 문우님, 유 문우는 나의 건강을 걱정을 하며 십 수년을 민들레 뿌리를 캐고 공해 없는 솔잎을 따서 소포로 붙이며 나의 건강을 걱정해 주었던 문우님, 또한 지금은 연락이 끊겨 생사도 모르는 나의 대학시절의 은사님 서울여자대학의 교무처장을 하셨던 배 한경 박사님, 나의 고등학교 때의 짝 이 영철 사장, 그리고 대학 강단에 섰을 때 내 강의를 좋아하며 교수님 교수님 하며 나를 지극히 좋아했던 나의 학생들 최 재수, 한 상찬, 조 남국 님 들 너무너무 보고 싶습니다.
첫 번째 조국인 한국에서 의 삶과 제2조국인 캐나다에서 삶을 되돌아 본 저의 글이 해외에서 살아가는 동포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동시 진실되게 살아가려는 삶의 의욕을 북돋우는데 조그마한 격려와 위로가 되기를 바라면서 끝을 맺는다. (내 사랑 나의 조국 나의 동포 씨앗으로 남으면 언젠가 그리움의 꽃으로 피어나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