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이


마이클 이: 먼 길을 돌아 다시 찾아온 나라에서

박정희 정권 시절, 데모로 날밤을 세우다 떠밀려 졸업이란 걸 하게 되고,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졸업 후 ‘늙은’ 사병으로 가서 받게 될 ‘반인륜적 박해’를 피해서 복무기간이 좀 길긴 했지만) 장교로 군복무를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큰 이민가방 두 개를 둘러멘 유학생으로 토론토 피어슨 공항에서 캐나다를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이 만남이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캐나다와의 길고 질긴 인연의 시작이 될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때까지 캐나다라는 나라는, 얼마 전 영국기가 들어 있었던 국기가 빨간 단풍나무 잎으로 바뀌었으며, 지리시간에 중부 프레리(prairie)에서 귀리가 많이 재배된다는 것이며, 군 훈련소 시절 아침마다 지나치는, ‘한국공군 1호기’라고 전시되어 있었던 프로펠러 항공기가 1940년대 위니펙에서 제작되었다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고, 저와는 특별한 인연을 가지게 될 것으로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필 유학을 캐나다를 택하게 된 것은 거의 우연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만 해도 한국의 웬만한 도시면 들어와 있던 미국문화원(USIS) 같은 곳을 통하여 미국 대학의 정보는 어느 정도 얻을 수 있었지만, 캐나다에 대한 정보는 얻기 어려웠는데, 미국 대학들에 입학원서를 보내면서 그냥 끼워 넣은 캐나다 대학 두 곳에서 재정지원을 해 줄 수 있다는 제안이 왔기 때문입니다.

당시 한국은 빈곤을 겨우 벗어나고 있었는데, 오랜 군사독재의 잔재로 불필요한 규제가 나라를 덮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오늘날처럼 가고 싶다고 누구나 갈수 있는 유학이 아니어서, 외국대학에서 재정지원을 약속 받은 조건에서도 문교부의 유학자격시험이란 (영어, 국사, 국민윤리였던 것 같습니다) 터무니없는 절차를 거쳐야 했기 때문에 특히 시험에 약한 저에게는 큰 시련을 주었습니다. 요즘은 동사무소 가서도 발급받을 수 있는 여권을 받기 위해서 신원조회에 소양교육까지 받아야 하던 엄혹한 시절이었습니다. 험난한 과정을 거쳐 겨우 유학허가를 받고 여권을 발급받았으며, 캐나다대사관에서 인터뷰를 하고 54주짜리 학생비자를 얻게 되었습니다. 김포공항까지 환송을 나와 부디 성공해서 돌아오라며 손 흔들어 주던 친지, 친구들을 뒤로하고, 이제 곧 마주칠 낯선 환경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 교차하는 가운데 노스웨스트 밤비행기를 탔습니다. 캐나다 직항이 없던 시절이라 시애틀에서 토론토 행 항공기를 갈아타야 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 마침 에어캐나다가 파업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영어 사전에 스트라이크(strike)가 파업이란 뜻은 알았지만 캐나다 도착 첫날 서슬 퍼런 독재 정권에서 구경하지 못했던 낯선 노동쟁의가 마냥 신기하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학교에서의 충격은 제법 컸던 것 같습니다. 기숙사 앞에서 처음 만난 지도교수는 자그마한 체구에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이셨는데, 대뜸 다가와서는 네가 xx 냐? 나는 누구다 하시면서 악수를 청해왔습니다.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처음 이 분의 ‘외모’가 생각보다 ‘누추’해서 교수일 수는 없고, 필시 기숙사 직원일 것이라고 단정했던 첫 판단부터 빗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외국이라고는 처음 나가보는, 그것도 비행기를 타고 가는 저에게 주변에서 코디해 준 대로 청색 양복에 넥타이까지 매고, 장거리 비행으로 숨이 죽어 내린 학생과 반바지에 샌들 차림으로 나온 지도교수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입고 갔던 양복은 그 후 입을 일이 없어서 구세군으로 보내집니다) 기숙사에 짐을 놓고 댁으로 데리고 가셨고, 어떤 오렌지 닮은 낯선 과일 (grape fruit)을 내 주셨는데 손으로 까려고 했더니 이것은 칼로 반을 갈라 숟가락으로 퍼먹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시던 기억이 납니다. 만나는 모두가 소위 문화적 충격(cultural shock)의 대상이었습니다.

도착 다음날이 되자 매일 오후 두 시면 소위 디스커션의 미명하에 교수님 방으로 불려가 기초지식과 수강할 과목과 논문 등에 관한 고문에 가까운 ‘인정심문’을 받았습니다. 쏟아지는 졸음을 견디기 위하여 커피를 사발로 마시게 되었는데, 아직도 커피를 마실 때면 힘겨웠던 그 시간들이 떠오르곤 합니다. 이 때, 군에서 몸에 밴, 교수 앞에서 취한 ‘열중쉬어’ 자세가 대학원 동료들에게 처음 보는 이방의 문화로 오래 회자되기도 하였습니다. 워낙 한국에서 배운 것이 없고 그마저 군에 가서 다 까먹었으니, 말씀 중 간간히 한숨을 쉬시는 걸 보니 교수님이 분명 큰 일 났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한국의 대학들도 장족의 발전을 거듭해 형편이 많이 나아져 있습니다만, 그 때까지 한국에는 ‘이름만 교수’가 가르치는 ‘무늬만 대학’ 들이 적지 않았으며, 이에 더하여 불안하던 정국에서 데모로 날밤을 세던 시간 속에서 얻은 지식의 양은 대학원 과정을 이수하기에는 정말 초라한 정도했을 것입니다. 첫 몇 년간의 수학은 그야말로 물을 빨아들이는 마른 스펀지처럼,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책이며 논문이며 닥치는 대로 읽었으며, 영어가 딸리니 시험지를 교과서의 테이블이나 요약부분을 통째로 외워 채우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하루 3~4시간 수면으로 만족했던, 정말 깡으로 버틴 무모한 시간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온 치아가 흔들리기도 했는데, 그때 악을 품고 버티게 해 주었던 실체는 학문에 대한 열정 보다는, 어처구니없게도, 이 난관을 이겨내지 못하면 맨손의 ‘불명예 귀국’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강박감이었음을 고백해야겠습니다. 영어가 조금 나아지자 동료들과 함께 작업하거나 토론할 기회도 생기게 되었는데, 사람이 사는데 한국식의 무한 경쟁보다는 협력이 덜 피곤한 형태라는 교훈을 얻게 된 때이기도 합니다.

처음 토론에서는 주눅이 들게 마련입니다. 아는 것조차 제대로 표현해 내지 못하고 동문서답 하는 한국 학생들과 달리 캐나다 학생들은 두 개를 알면 열 개를 아는 것처럼 이야기 합니다. 어릴 때부터 익혀온 토론식 훈련의 결과이겠습니다만, 토론과 비판을 통해서 얻어지는 지식 또한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많습니다. 영어로 된 책이나 논문을 읽는 속도는 당연히 단순비교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한(외)국 학생들이 정독을 하는데 비해 캐나다 학생들은 속독을 해서 받아드리는 속도가 빨라 보이지만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제 교수님의 ‘주장’에 동의하게 됩니다. 대학원 몇 년 동안 정말 많이 배운 것 같습니다. 졸업 후 연구 활동을 하면서 아이디어가 막히게 되었을 때, 대학원 시절에 얻은 처음의 지식으로 다시 돌아가 해결한 적이 많습니다. 본국에서 자금지원이 어려웠던 시절, 학자금과 생활비의 대부분은 캐나다 자연과학 공학 연구재단(NSERC)을 통하여 지원받았습니다. 이는 캐나다 시민의 세금으로 조성된 자금입니다. 중국 고사에 나오는 음수사원(飮水思源) 이라는 말을 기억합니다. 물을 마실 때는 그 물이 어디서 왔는지 근원을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캐나다 시민의 세금으로 공부했고, 그 덕에 지금껏 생활하고 자식들 공부 시킬 수 있었으니, 따라서, 저는 캐나다에 큰 빚을 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졸업 후 짧은 연구원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지 벌써 30년이 가까워 옵니다. 당시는 캐나다에 머물며 일을 찾는 것이 비교적 용이할 때여서 영주권을 신청하고 눌러 살 생각이 잠시 스쳐가기도 하였으나, 힘들여 얻은 지식을 고국의 새로운 세대들에게 전하고 싶은 욕구가 훨씬 컸을 때여서 망설임 없이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캐나다 유학에서 얻은 연구 성과와 경험은 상당한 경쟁력이 가진 것이어서, 한국에서 일자리를 찾고 지금껏 활발한 연구 활동을 수행할 굳건한 토대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유학 시절, 현지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계시면서 빠듯한 살림 속에서도 고국 학생들의 어려움을 들어주시고, 챙겨주셨던 교민들을 기억합니다. 평생 잊을 수가 없는 분들인데, 가까이 계시면 맛있는 점심이라도 한번 대접하고 싶습니다. 캐나다와 교민 공동체에 진 채무는 일부라도, 기회가 닿는 대로 이 사회와 이민 후배들에게 갚아나갈 작정입니다.

캐나다에서 생활하는 동안 지금까지도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공부를 시작한 다음 해 결혼을 하고, 그 이듬해 태어난 아들과 세 식구가 학교 아파트에서 살았습니다. 여전히 학업을 따라가는데 급급한 시절이어서 여전히 가족을 돌볼 수 있는 능력이 모자란 가장이었습니다. 그 때는 시간도 없고 해서 2~3주에 한 번씩 먹을 거리 장을 보았는데, 아마 토요일 오후였던 것 같습니다. 그날따라 평소 잘 가지 않았던 그로서리를 가게 되었는데 이것저것 담다 보니 거의 100불 어치 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토요일 오후라 계산대에 긴 줄이 서고 (그 때는 일요일은 대부분의 가게는 문을 열지 않을 때여서 토요일이라 더 붐볐던 것 같습니다) 계산 차례가 다가 왔을 때 집에 지갑을 두고 온 것을 깨달았습니다. 계산원에게 그 사정을 이야기 하고 카트를 구석으로 치운 후에 돌아가 돈을 가져와서 계산하도록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계산원이 점포 매니저를 부른 것 같습니다. 곧 덩치가 크고 턱수염을 기른 매니저가 나타나서 다시 사정을 설명하고 30분 내로 돌아오겠다고, 카트만 맡아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이 매니저가 그냥 씩 웃더니 계산하고 그냥 갖고 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돈은 다음에 올 때 갖다 주면 된다고 흔쾌히 허락합니다. 우선 그 처분에 놀라기도 했지만, 알지도 모르는 동양 학생에게 뭘 믿고 이런 도박을 할 수 있는 것인지가 몹시 궁금해 졌는데, 곧장 이 신뢰가 이 사회를 지탱하고 공동체를 엮는 그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이 사회가 갑자기 부러워졌고, 순간 나도 이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강한 욕망이 일었습니다. 물론 30분 이내 돈은 갖다 갚았고 그 이후 다른 그로서리보다 약간 더 비싸다는 세평이 있었음에도 이 도시를 떠날 때까지 그 가게를 단골로 삼는데 어떤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학교 앞 편의점의 풍채 좋던 영감님도 등교를 서두르다 도넛과 커피 값을 제대로 챙겨오지 못했던 이 외국인에게 언제든 가능한 외상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언젠가는 캐나다로 돌아가 살고 싶다는, 이 나라에 대한 끝없는 짝사랑을 품게 만들어준 분들이었습니다.

제가 실험 조교를 맡았던 실험 조에 속해 있었던 이 여학생은 나이가 근 사십에 가까운 늦깎이로 종종 놓친 과제나 숙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주말이나 저녁 시간 제 실험실로 찾아오곤 하였습니다. 전자 제품 수리를 업으로 하는 남편과 아이들과 살았는데, 옷차림이나 타고 다니는 자동차로 볼 때 경제적으로 부유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한번은 여느 때처럼 실험실로 찾아와 봉투를 하나 들이밉니다. 1000불짜리 갈색 지폐 (그때 1000불짜리 캐나다 화폐가 있는 줄 처음 알았습니다)가 다섯 장이나 들어 있었는데, 자기 어머니가 제게 가져다 주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조교로 일하며 받은 급여가 월 500불 남짓 하던 시기였습니다. 큰 몽둥이로 머리를 한 방 얻어맞은 느낌이 왔습니다.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며 받은 것으로 전해 달라, 나보다 더 이 돈을 필요로 하는 학생도 있을 것이니 나는 양보하겠다고 우겨 겨우 돌려보낸 후에도 이 일은 30년이 지난 지금껏 제 머릿속을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여학생이 홀로 사는 어머니를 뵈러 갔다가 우연히 경제적으로 힘들어 보이는 동양 학생 이야기를 했겠지요. 그래도, 자신들도 그렇게 넉넉해 보이지 않는 이들이, 지금 보아도 큰돈을, 한번 보지도 못한 외국 학생에게 아무 조건 없이 줄 생각을 한다는 것이 고마움에 앞서 놀라움으로 다가왔습니다. 제 자식들 대학 학비조차 제대로 안 대줘서 방학이면 자식들이 페인트칠을 하고 광산에 가서 노동을 해 스스로 학비를 마련하도록 ‘방임’하는 ‘인색’한 부모들이 어떻게 이런 엄청난 일을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어려운 때였습니다. 캐나다라고 해서 강자가 약자를 지배해 온 인류 보편의 역사가 단절된 곳도, 인종차별이 온전히 사라진 곳이라 생각되진 않지만, 적어도 사회적 약자를 서포터 하고자 하는 정부 시스템이나, 가진 것을 함께 나누는데 익숙해 져 있는 시민 의식은 이 사회의 건강을 유지하고 발전시켜온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8년 만에 돌아온 한국 사회에 다시 적응하는 것은, 캐나다에 첫 발을 디뎌 놓았을 때만큼이나 어려웠는데, 특히 권위주의적 직장문화 속에서 연공서열이 중시되는 의사결정 구조에 따르는 것이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첫 연구년을 받아 돌아왔을 때, 옛 지도교수님이 (이분 또한 영국에서 이민을 오신 분이었는데, 늘 국적을 두 개 가져서 나쁠 것은 없다고 영주권 신청을 권하시곤 했습니다) 다시 영주권을 신청해 볼 것을 권하셨습니다. 이 때 얻게 된 첫 영주권은 때마침 터진 한국의 경제위기(IMF사태)로 쓸모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최소한의 정착자금조차 장만하기 어려운 사정에서 전 가족이 이민을 결행하는 것이 가장으로서 매우 무책임한 행위이며, 무모한 이민에 따라올 위험도 적지 않아서 포기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커가고, 한동안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시간이 지속되었습니다. 회귀하는 물고기가 옛 물맛을 따라 강을 거슬러 오르듯, 캐나다에서 학교를 다녀보았던 큰 아이가 그 물맛을 잊지 못해 힘들어 한 끝에 열 두 살 나던 해 혼자 가방 하나를 메고 돌아왔으며, 몇 해후 작은 아이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자식들에게나마 보다 다양한 선택의 기회를 주고 싶은 부모의 바램과, 함께 떠날 수 없는 현실적 문제가 절충된 모험이 내재된 고육책이었습니다. 일찍 부모의 슬하를 떠나 그만큼 일찍 철이 들어버린 아이들은, 감사하게도, 스스로 잘 성장해 주었고, 느끼지 못한 사이에 이제 부모를 걱정할 만큼 든든한 아름드리나무로 자라나 각자 주어진 사회적 역할에도 충실한 듯합니다.

20년의 시간을 지나 두 번째 영주권을 얻게 됩니다. 30년 전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이번에는 이민자로서 짐을 싸고 있습니다. 수구초심(首丘初心) 이라는 말도 있듯이 (여우도 죽을 때 제가 살던 굴 쪽으로 머리를 두고 죽는다는 뜻이지요) 밖에 나가서 살다가도 고향에 돌아올 나이에 거꾸로 이민 짐을 싼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던 결정이었습니다. 먼 길을 돌아 다시 찾아온 이 나라에서 깨끗한 물과 맑은 공기를 만끽하며, 그 동안 사는데 지쳐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던 가족과 자신을 위해, 그리고 이 공동체의 건강을 유지하는데 보탬이 될 구성원으로, 남은 인생을 채워나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