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혜정


박혜정: 아리랑

한국 문인협회 회원/순수문학 등단
캐나다 뮤즈 청소년 교향악단 지휘자

2000년, 한국의 TV에서는 한창 캐나다의 교육과 의료제도에 대해 서로 경쟁하듯 방송을 했다. “마치 캐나다로 이민을 가지 않으면 큰 일이 나듯... " 그래서 아이들의 미래를 위하여  독립이민을 신청했다. 하지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없이 이민 신청한지 2달 만에 “NO INTERVIEW!" 그 후 2달 만에 비자가 나와서, 방문하려던 것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랜딩이 되어버렸다.

 캐나다 도시 중에 이름을 들어 본 곳이라고는 토론토와 밴쿠버 뿐 이었다. ‘그럼 이 넓은 캐나다의 도시 중에 어느 도시에서 살아야하지?’ 그래서 일단 밴쿠버에 가보고 다음에는 토론토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토론토에 가보니 산이 없어서인지 우리가 살던 한국과는 달라 보였다. 풍경도 낯설고 기후도 한국보다 더 덥고, 더 춥다고 하니까 우리 막내가 반대를 했다. ‘그럼 밴쿠버?’

 밴쿠버에 아는 사람이라곤 유치원 때부터 밴쿠버로 이민 오기 전까지 내게 바이올린을 배웠던 제자 한 명밖엔 없었다. 한국에 있을 때 그 학생 엄마가 “선생님, 한국은 스승의 날이지요?” 라는 전화를 내게 했었다. ‘이민 생활도 바쁠 텐데…….’ 그 전화를 받고 한동안 감동스러웠었다. 그 때의 감동이 커서인지 그 엄마와 좋은 인연이 되어 밴쿠버로 살 곳을 정하게 되었다.

큰 애의 적응력은 놀라웠다. 한국에서 공부를 잘 하던 애가 아니고 연예인이 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는데 이제는 정신을 차리고 공부에 흥미를 붙이게 된 것이다. 거기에다 큰 애의 외향적이고 적극적인 성격도 한국보다는 캐나다에 더 잘 맞는 것 같았다.

 온 가족이 이민을 와서 쓴 일기의 첫 페이지는 캐나다에 먼저 온 남편의 일로 시작되었다. 남편은 전공을 살려 건축 일을 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허름한 집을 사서 손수 설계를 하고, 자기 나름대로 드림하우스라고 하며 집을 지었다. 그렇지만 남편이 하고자 하는 일은 생각 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자본도 필요하고 집이 빨리 팔리지 않으면 돈이 묶여 있어야 하는 어려움이 컸기 때문이었다.

나의 경우에는 우연히 신문에서 크리스천 한국어 학교의 오케스트라에서 자원봉사자(volunteer)가 필요하다는 광고를 보고 도와드린다고 했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새 학기부터 바이올린도 지도 할 선생님이 필요하다고 해서 그 일부터 하다 보니 다행히도 내가 한국에서 했던 것과 같은 일로 연결이 되었다.  그래서 아이들 바이올린 레슨도 시작하고 한국어 학교에서 오케스트라도 지휘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곳에서 홈스테이라도 할 수 있도록 집을 설계해서 크게 지었는데 나의 일이 바쁘다 보니 홈스테이를 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 집은 우리 가족만 살기에는 너무 컸다. 그래서 남편이 드림하우스라고 모든 정성을 다해 꼼꼼하게 지은 집을 팔기로 했다. 그리고 매 달 수입이 들어오는 일을 찾아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면 나중에 집을 다시 짓기로 했다.

그런데 집을 팔고 나니 무엇을 해야 할 지 막막했다. 직장만 다녔던 남편은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에 자신이 없어 했다. 그러던 중 텔레비전을 보는데 카페에 대한 것이 방송되었다. 여자들의 로망은 카페를 한 번 운영해 보는 것인데, 나도 그 방송을 보니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하고도 싶어졌다. 그런데 마침 내 제자의 엄마가 “선생님, 제가 가지고 있는 상가가 비어 있는데 그곳에서 뭐든 하실래요?” 라고 물어보았다. “그럼 한번 가봅시다.”

아무 경험이 없는 나의 눈에는 그곳이 안성맞춤으로 보였다. 사방이 넓은 유리로 되어있고, 권리금 걱정도 없었다. 한국에 있을 때 비 오는 날 경복궁안의 커피숍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마셨던 커피에 대한 추억이 떠올랐다. ‘아! 비가 많이 오는 밴쿠버에서 창밖으로 비 오는 풍경을 보면서 커피를 마신다면 얼마나 멋질까! 또 라이브 음악도 연주하고.’  카페에 대한 광고문구도 ‘무대는 음악가에게, 벽은 미술가에게 빌려드립니다’ 로 하고 시작했다.

하지만 운영을 하다 보니 이곳을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적인 생각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거리와는 상관없이 지방이라도 커피숍만 멋지다면 찾아다니고 했던 생각에, 한인 타운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거리는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등, 하교를 부모님이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한인 타운에서 점심약속이 끝난 후 다시 10분을 이동해서 커피를 마시러 오는 일이 쉽지 않았다. 또 나는 두 딸의 등하교를 담당하고 나의 일로도 바빴기 때문에 카페에서 주말 저녁에 하는 라이브 음악에만 신경을 쓰고 전반적인 것에는 무신경했다. 그리고 카페는 티나 커피, 또 케이크와 간단한 과자정도로 매상을 올려 보긴 쉽지 않았다.

만약 지금 하라고 하면 이곳 방식대로 아침 일찍 열어 스프와 토스터도 팔고 메뉴도 개발하고 했을 텐데……. 갈수록 카페 운영이 어려워졌다. 결국 경험 부족, 판단 착오로 나의 로망 카페는 문을 닫고 말았다. 그러나 일반 캐나다의 카페와는 다른 분위기를 가진 우리 카페를 사랑했던 분들은 매우 아쉬워하셨고, 또 이웃들은 지역사회에 봉사를 많이 한 카페로 기억한다. 지역 문화 축제기간 동안 갤러리로도 사용되었고, 작은 음악회도 열고, 문학의 밤 같은 행사도 했다.

우리 부부가 바빠서 아이들에게는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자립심있게 고맙게도 잘 커주었다. 큰 딸은 의사로, 작은 딸은 음악가로.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은 물론 옆에 붙어서 이것저것 하라고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부모가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사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이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니 유학생들은 주말에 할 일이 없어서 쇼핑을 하거나 노래방에 가는 것을 보고는 안타까운 마음에, 한국에서도  청소년 교향악단을 만들었던 노하우를 살려서 이곳에서도 청소년 교향악단을 만들었다. 연습을 하며 자연스럽게 어울리다 보니 한국어를 잘 하지 못 하는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잘 하게 되었다. 또 음악으로 캐나다와의 교량역할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봉사를 다니며 한국을 알리는데도 일조를 하게 되었다. 지금 나는 나대로 캐나다 뮤즈 청소년 교향악단을 만들어 청소년들의 꿈을 키워주고 지역사회 봉사도 한다. 또 남편은 다시 멋진 드림하우스를 짓는 일을 꿈꾸며 이곳의 회사에서 월급쟁이가 되어 열심히 일을 한다. 그래서 나의 이민 일기는 ‘매일 매일이 So far so good!’ 이 되길 바라며, 마지막 장에는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 라고 끝을 맺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