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브루스 (1897-1985)


조지 브루스 (1897-1985): A Visionary Adventurer with an Unyielding Dedication to Education

 
 

By Gloria Kim

조지 브루스 (George Bruce)는 신문 배달 소년, 식료품 점 직원, 지금의 선더 베이 (Thunder Bay) 에서 콜링우드 (Collingwood)로 이어지는 오대호 (Great Lake)에서 배를 탔던 선원과 앨버타 주립 학교의 선생님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부인인  엘렌 브루스 (Ellen Bruce, 결혼 전 성 Tate) 와 함께 캐나다 연합 교회의 해외 선교활동에 봉사하기 위하여 자원했습니다. 그의 초기 관심은 서 중국에 있었지만 그와 그의 아내는 선교의 필요에 따라 은혜롭게 한국에서의 활동을 수락했습니다. 퀸즈 대학교를 졸업 한 직후 조지는 현재는 북한에 위치한 함흥에서 한국어를 집중적으로 배우는 데 2 년을 보냈습니다. 그 후, 그는 만주 용정에 위치한 남고였던 은진학교에서 10년간 학교 교장으로 재직하였습니다. 용정은 그 당시 일본의 지배에서 탈출한 한국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학교는 1 학년에서 4학년으로 구성되었으며 등록금은 학생 가족의 재정 능력에 따라 책정되었습니다. 학교가 개교하면서 점차 교육이 향상되었으며 최대 400명의 학생들이 학교에 다녔습니다.

행정 및 교육을 담당하는 것 외에도 조지는 건물 유지 및 보수를 위한 수리뿐만 아니라 공간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며 학교 건축을 감독했습니다. 재정 삭감과 직원 부족에도 불구하고 그는 최선을 다했으며 적절한 시설과 우수한 교사들, 그리고 학교의 비용을 균형있게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또한 여학교를 위한 학교 창설을 시작하였으며70 명이 넘는 기숙사 학생에게 숙박 시설을 제공하고 약 200 명의 학생들에게 교실 숙소를 제공한 성서 연구원 건물 신축을 위해 힘썼습니다.

조지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한국에서의 교육이 번영하고 모든 인종과 종교의 사람들이 함께 더불어 살고 독립되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한국인들을 상상했습니다. 그는 재정적 문제들과 직원 부족이라는 현실과 맞다았지만  "학교를 위한 완전히 새로운 계획"과 건물 기금 설립을 계속해서 꿈꿔 왔습니다. 그는 교육 분야의 엄청난 성장 가능성을 보았고, 용정 주변에 새로운 지역 개발을 반가워 했습니다. 조지는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 특히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들을 모으기 위해 영어로 야간 학교를 운영했습니다. 캐나다 특파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조지는 새로 열린 야간 학교에 중국인이 없는 것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적도 있습니다. 그는 사람간에 접촉과 연결이 서로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고 믿었으며 지방 교회와 일본 당국과 접촉했습니다. 한 때, 조지는 철도 공사가 소녀 학교 운영에 방해가되지 않도록 일본 당국과 협력했습니다. 조지는 은진 학교와 관련된 복잡한 이슈들을 다루는 데는 익숙했지만 그는 궁극적으로 한국인이 운영하는 학교를 장려했습니다. 조지는 교장으로서 학교의 통치권을 넘겨주며 그의 겸손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교장으로 사임 한 뒤에도 은진 학교에서 한국을 떠날 때까지 가르쳤습니다.

"... 나는 나보다 앞서서 상황에 대하여 환상적인 가능성을 보았던 위대한 사람들을 아주 높이 평가합니다."
"이곳에 도착했을 사람들을 하나로 모을수 있는 뭔가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접촉과 상호 관계가 부족하기 때문에 많은 오해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조지는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엘렌에게 넬리라고 부르는 사랑스러운 남편이었으며, 로버트와 레나의 아버지였습니다. 아내와 가족이 외국 선교사들로서 가장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은 그의 편지에서 보여줍니다. 그가 잠시 후 토론토에 머물렀던 그의 가족들과 일시적으로 헤어졌을 때조차도 그는 엘렌에게 항상 관심을 쏟아 부었고 그녀를 한국으로 빨리 오라고 재촉하지도 않았습니다. 엘렌도 한국을 좋아했으며 모험가이자 교육자였습니다. 그녀는 온타리오 주 그랜드 밸리에서 자랐으며, 교사로 재직 중 교육 교환으로 런던에 갔으며 가서 친구와 함께 이탈리아 남부로 자전거 여행을 갔습니다. 그녀의 다른 교환 활동 중 캘거리에서 조지를 만났고, 그들은 스케이팅 데이트를 시작했습니다. 1925 년 결혼식을 위해 조지는 5일간의 일정으로 4명의 친구들과 함께 캘거리에서 토론토까지 차를 타고갔습니다.

"어떤 이유로 우리 집은 독신 여성들이 가정 생활을 원하며 오는 곳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약간의 봉사를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우리에게 기쁨이 것입니다. "

조지의 학위와 교육 경험은 평생 동안 한국과 캐나다 사람들에게 봉사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면서 조지 또한 계속 배울 수 있는 곳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는 신학을 현장에서 공부할 수 있는지, 아니면 자신의 휴가 중에 신학 공부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했고 일본어를 배우면서 자신을 잘 갖추기를 원했습니다. 한국과 만주에서 6 년 반 동안 지낸 후 조지는 토론토 대학에서 공부하였으며 교육학 학사 (Bachelor of Pedagogy)를 받았습니다. 캐나다로 돌아온 조지는 통신 교육 프로젝트를 감독하고 알버타 정부 교육부의 해당 지사에서 160 명의 교사들을 지휘했습니다. 1962 년에 그는 은퇴하고 토론토로 이사했습니다. 그의 학생들 중 다수가 캐나다의 여러 도시로 옮겼지만, 그들과 연락을 유지했습니다.

"나는 편협함에 반대합니다."

조지 그리고 그의 경험은 한국과 그의 가족의 진전에 잊을 수 없는 흔적을 남겼습니다. 은진 학교 졸업생들은 1971 년 조지를 한국으로 초청하였으며 그는 교육 분야에서의  헌신을 인정받아 한국 정부로부터 한국 공훈 훈장을 받았습니다. 그의 아들 로버트 브루스 (Robert Bruce)는 그의  아버지의 전기를 쓰고자 그가  쓰고 받은 편지들을 모았습니다. 조지의 증손녀는 중국 여행을하면서 로버트에게 은진 학교의 위치를 알려줄 것을 요청했고, 학교 건물이 여전히 자리 잡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건물 주변을 둘러보고, 그녀는 증조부 할아버지를 벽에 걸린 사진으로 발견 할 수 있었습니다. 조지의 증손녀 중 또 다른 한 명은 저의 친구입니다. 그녀는 “빨리, 빨리” 와 “기도합시다”를 한국어로 말할 줄 압니다. 배움, 연결, 관용에 대한 조지의 사랑은 그의 가족들과 그의 헌신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많은 세대들을 통해서 살아 있습니다.

"1927년-1941사이에 수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흥미로운 기간이였습니다. 다음날에 무엇이 닥쳐올지 짐작할 없을 때였으며 년간의 불안이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수년간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그리스도인들과 친밀하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기간 동안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우리가 봉사하고자 했던 사람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당시의 추억은 소중하며 여행이 끝날 때까지 우리와 함께 것입니다. "
KCS 1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