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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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훈 씨는 1932년 12월 25일에 태어난 한국전 참전 용사입니다. 김태훈 씨가 한국전 때 조국을 위해 싸웠을 때 그는 19살이었습니다. 전쟁 중, 그는 육군 헌병대에 자원했고 헌병 중사로 육군본부의 참모총장실에서 복무했습니다. 그는 금화캠프에서 7사단에서 복무했으며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의 미군사관학교에서 8개월 동안 훈련했습니다. 이후 부산 동래 육군사관학교 교관을 거쳐 국방부 과학연구소 화학과 연구원으로 근무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고려대학교에서 화학 전공으로 학사 학위를 마쳤습니다. 그 후 그는 신한 과학 주식회사에서 일했습니다. 1967년 7월 캐나다로 이민 온 그는 BC 포트 무디스에 있는 IPSCO 철강 회사에서 20년간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은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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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 램지 (Kai Ransay) 는 BC주 출신의 12학년 학생입니다. 카이는 다른 사람들과 일하는 것을 좋아하고 지역 사회에 있는 사람들과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여가 시간에 카이는 독서, 이야기 쓰기 그리고 축구를 즐깁니다. 그녀는 세대간의 통합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을 즐겼고 그녀가 만든 아름다운 인맥과 한국전에 대해 배운 이야기에 감사합니다.


자신의 합의로가 아닌

글쓴이: 카이 램지

그것은 선택이라기 보다는 정당성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갈지 말지 선택할 수 있었다.
복수를 하지 않고 미국에 머무르는 것.
그의 형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거나 해외에서 살기 위해서.
그는 전쟁을 선택했다.

그는 미국에서 공부하기 위해 한국을 떠났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법을 배우고.
군대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광대한 나라를 가로질러 여행하고.
그의 정거장은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이었다.

그는 대학의 화학과에서 머물렀다.
한 철강 회사 내에서 품질 관리 입력 작업.
사관학교는 약자를 위한 곳이 아니었고
그것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를 때리고 멍들게 했다.
공부는 어디까지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전쟁이 그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비록 한국이 그의 마지막 체류지는 아닐 것이다.
전쟁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찢으면서
그것은 우리 군인을 건드리지 않았다.
50만 명 이상의 한국인이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들 중, 그의 형이 그들 중 하나였다.
그는 살아남아 다른 날을 맞이했다.
다시 캐나다로 이사하기 위해서.
가족을 키운 곳.
그가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했다.

어릴 때 엄마를 잃기 위해서.
차례로, 그녀는 그들의 자식을 남겨둔다.
하지만 그의 아이들은 그를 도와서 이겨낸다.
그가 나이가 들면서, 그들은 그를 방문하여 사랑을 보여준다.
그는 그들을 사랑한다. 그들은 유일한 친족이기 때문에.

전쟁은 평화를 가져다 준다고 믿어진다.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국가들에게.
하지만 우리 병사는 잘 알고 있다.
각 나라마다 갈등이 있다는 것.
더 많은 불안을 가져오기 위한 싸움.

이제 그는 골프를 치고, 수영을 하러 가고, 활동적인 것을 좋아한다.
그는 제멋대로의 생활을 하고 있다.
등산, 교회 가기.
그가 계속 바쁘기만 하다면 혼자 사는 것은 외롭지 않다.
인생은 쉽지는 않지만 더 낫다.

우리 군인은 항상 기억할 것이다.
그가 희생한 것, 그의 가족이 희생한 것을 기억하라.
전쟁은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그것은 국가를 변화시킨다.
왜냐하면 그는 목적을 가지고 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합의로는 아니다.

그것은 선택이라기 보다는 정당성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갈지 말지 선택할 수 있었다.
복수를 하지 않고 미국에 머무르는 것.
그의 형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거나 해외에서 살기 위해서.
그는 전쟁을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