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몬


이시몬: 지난 40년을 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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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0년을 돌아보며....

1975년 5월 12일의 서울 하늘은 참 맑고 아름다운 봄 하늘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비행기들이 착륙하고 이륙하는 김포공항의 하늘은, 27년의 사랑하던 조국의 품을 떠나며 18년 동안의 부산 국제시장의 어린시절, 약 9년동안의 서울에서의 대학생활, 교편생활 그리고 방송 어린이합창의 추억에 며칠동안 밤을 새우며 가슴앓이한 이별의 설움에 울고 있었습니다.

 
 


그당시엔 대한민국 항공사가 없었기때문에 노스웨스트에어라인에 몸을 실고 약 36시간 비행으로
캐나다 캘거리로 이민하는 우리 부부와 4살 2살 아이들 둘이었습니다.
우리 손엔 정부에서 허락한 최대 이주금 $3500과 이민 짐 셋이 전부였습니다.

다시는 살아서 못 만날것같은 서러움에 제가 근무하던 학교 교장 사모님은 목을 안고 우셨습니다.
그분들은 절 한국 음악교육에 절대 필요한 인재라며 사표를 일년동안 받기를 거부하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완강한 저의 결정에 장래를 축복해 주시며 지금도 잊을수 없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자넨, 가슴에 불이 있어! 그 불은 병이야. 그 불을 끌수 있어야 해!"

한참 흐느끼다가 환송객에게서 빠져나와 조용한 모퉁이를 발견하고
청와대를 향하여 고개를 숙였습니다.
"대통령 각하! 정말 죄송합니다.
서울 교대를 졸업하고 교사로서 훌륭한 대우를 받으며 어린나이에 세 TV 어린이 방송의 기회를
주시며 지난 5-6년의 삶을 불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 넓은 세상에 가서 더 많이 배우고 크게 성장해서 다시 조국 땅에 돌아 오겠습니다.
대통령 각하처럼 조국을 섬기며 불처럼 살겠습니다.
10년 안에 목표를 다하고 돌아 오겠습니다."
청와대를 향하여 한참 고개숙여 기도한 기억이 엊그제 갔습니다.

샌프란시스코, 밴쿠버를 거쳐 약 이틀 후 우리는 캐나다 캘거리에 도착했습니다.
도착 직후 아파트 렌트비, 일상 생활용품을 장만하는데 $1000 이 나갔습니다.
수중엔 $2500이 네 식구가 살아 나가야 할 전부였습니다.

낮에는 학교로, 저녁에는 6-10까지 식당에서 그릇을 씻으며 밤 11시부터 새벽 3-3:30 까지 포드자동차 딜러의 빌딩청소를 시작했습니다.
우리 아이들 엄마도 낮에는 식당에서 일을 하고 저녁엔 아이들과 같이 있다가, 밤 11시 부터 우리
네 식구는 포드 자동차로 출근했습니다.
지하에는 정비사들의 공간이었기때문에 온통 기름때가 범벅이 되어있고 매일 뜨거운 물로 쓸고
닦아야하는 엄청난 노동이었습니다.
빌딩 일층은 약 20여대의 각종 차량이 반짝거리는 타일 바닥에 진열이 되어있고 약 10개의 세일즈맨 방들이 있었습니다.
빌딩 위층은 약 10개의 사무실이 있었고 커피숍도 있었습니다.

우린 도착하자마자 우리 아이들 둘을 카페로 데리고 가서 테이블을 두개 붙이고  의자를 여러개모아 책을 보다 잠 들수있도록 공간을 만들어 줍니다.
우리 둘은 먼저 진공청소와 테이블 청소는 아이들 엄마가 맡고, 저는 제일 중요한 20 여대의 자동차 쇼룸청소에 들어갑니다.
매일 밤 긴 겨울의 자동차 쇼룸은 온통 흙과 눈이 엉켜붙은 진흙밭이었습니다.
뜨거운 물로 약 두시간에 걸쳐 온 타일바닥을 씻어내고 일주일에 두번씩 왁스로 옷을 입혀주는 정성스런 바닥청소는 저의 가장 크고 중요한 임무였습니다.
약 세시간 반의 작업후 빌딩 뒷문을 열고 그날 모인 모든 쓰레기백을 버리는 순간, 영하 2-30도의 그 차디찬 겨울밤의 바람은 감사와 환희의 밤 인사로 절 맞아 주었습니다.

-20 에서 -30도 까지 내려가는 캘거리의 겨울, 일년 약 6개월이 혹독한 추위, 그러나 부유한 도시- 오일붐의 캘거린 우리 가족에겐 영원히 잊을수 없는 이민 초기의 뼈아픈 고통의 나날이었으나 제 일생 제일 많은 감사의 눈물을 흘린 곳입니다.
새벽 세시에 일이 다 끝나 땀투성이의 몸으로 카페에 아이들을 데리러가면, 보던 책은 테이블에
열려있고 의자에서 두 아이들은 깊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두 병아리들을 품안에 안고 웃옷으로 감아준 다음 우리 둘은 하얀 얼음판위의 찻속으로 아이들을
옮기며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우리 가족에게 건강을 주십시오. 우린 하나님 밖에 의지할곳이 없습니다."

실은 처음 도착한후 약 한 두달동안 무척 후회했습니다.
가족들이 너무 불쌍했습니다.
저 혼자서 공장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생존을 시도해 보았으나 공부를 할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우리 부부가 아이들을 희생시키며 같이 뛸수밖에 없었습니다.

주중엔 하루 4-5 시간 수면을 취하고 주말엔 그래도 어느정도 휴식을 취하며 이민생활 첫해를
신앙의 힘으로 감사와 감격을 드리며 지날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민생활 만 일년이 지나 한해를 둘러보며 결산할것이 너무 초라함을 발견했습니다.
학교생활과 살아남기위한 생계의 수단에서 어린아이들의 희생과 엄마의 헌신에 비해 발전과
수확이 너무 빈약함을 보았습니다.
결론은 당분간 학교를 포기하고 100% 일에 매진하여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후, 편의점 주물공장 식당 가리지않고 최대의 수입을 확보하기 위하여 전방위의 일터로 하루
평균 16시간 뛰어 들었습니다.
권총강도, 자정가까이에 칼을 든 십대들과의 난투극, 그리고 피투성이로 응급실에 누어 감사의
눈물로 하나님께 아뢰던 사연들.... 몇년후 밴쿠버로 이주후 가족들에게 알릴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민생활 일년은 생존을 배운 시기였으나 두번째 해는 재원을 확보하겠다는 뚜렷한 목적에
다니던 학교까지 포기하고 일에 전념하며 가족을 위한 최소한 5년간의 생활비를 확보한후 다시
학교로 돌아가겠다는 신념은 이민 생활 약 이년동안 약 5만불을 저축할수 있었습니다.
76-77년도의 5만불은 40년후 오늘의 값어치로 20만불은 되겠지요.

77년 7월, 밴쿠버의 한 침례교회에서 성가대 지휘자의 초빙이 저에게 주어졌습니다.
한참 일에 골몰하며 부유한 캘거리의 거리에서 재원을 모으던 저에게 이 제안은 신비한
힘으로 저에게 접근해 왔습니다.
"눈에 보이는 부를 택하랴 아니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택하랴.....???"
묵상속에서 마치 홍해가 갈라지듯 땅의 지혜와 하늘의 지혜를 시험하는 시험대에 약 한달간
씨름하던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그 당시 캘거리는 부유한 정말 블랙오일이 넘쳐 흐르던 흥청거리던 도시였고 밴쿠버는
자연 경관은 뛰어나나 일자리가 없어 많은 사람들이 다른 도시로 떠나가던 참 살아남기 힘들고 인구가 줄어가던 쓸쓸한 도시였습니다.

77년 11월,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어느 오후, 우리 넷은 처음 밴쿠버에 교회식구들의 도움을 받으며 정착하게 됩니다.

약 3-4개월후, 오래되고 큰 햄버거식당이 운영 부실로 시중에 나왔습니다.
매일 저녁 그리고 주말 자정 넘어12-2시 까지가 그들의 매상의 근원지임을 알아낼수 있었습니다.
약 한달간 집중 조사결과, 부실경영의 원인은 오너부재로 인한 자연손실,가장 피크타임에 반도
건져내지 못하는 신속성의 부재, 창의적이고 적극적인 새 메뉴의 부재였습니다.

한국인으로 처음으로 삼십의 나이에 밴쿠버에서 가장 큰 햄버거식당에 도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무엇보다 캐나다 은행의 소기업인에 대한 지원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약 65%의 지원을 받고 시작한 첫날,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간 우리에게 두 사람의 요리사들이
열쇠를 넘겨주었습니다.
이미 지난번 오너에게 이주전 사임의 통지를 했다고....
세 사람의 요리사중 두사람은 즉시 그만두고 중국인 요리사 한사람이 제 옆에 남았습니다.
이 위기의 탈출법은 한길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직접 요리사가 되는 방법, 그 길이 유일합니다.

인수한 첫날, 지난 삼십년동안의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50년대 중반 초등학교 어린시절부터 부산국제시장 구멍가게에서 할머니 할아버질 도와 군고구마
오징어를 구워팔던 기억, 한 밤중 새 빨간 하늘과 무서운 화마의 울음소리, 소방관을 뿌리치고
우리 쌀가게로 뛰어 들어가던 아버지의 모습.....
다음날 아침이면 물로 범벅이 된 2공구 3 공구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던 아주머니들....

"여기서 살아남아야 해!"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해방후 부산으로 몰려온 재일교포들의 삶, 6.25후 몇십만의 북한 주민
들의 부산 국제시장의 억척같은 삶의 모습, 죽음과 삶속에서 굳건히 일어서 제 일차 이차 경제 개발의 성공으로 조국을 새동력으로 이끌어가고 있는 지도자들의 모습에 눈물을 쏟으며 무서운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 이곳! 바로 이 햄버거 식당에서 죽으리라고!"

그날 밤부터 무서운 도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떻게하면 더 맛있는 햄버거를 구울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손님을 놓치지 않고 더 빨리 만들어 낼수 있을까?
제가 요리사가 되고 엄마는 손님이 되어 10여 가지 색상의 플라스틱 칩을 이용하여 끊임없는
반복의 훈련을 하게 됩니다.
새벽 두시에 문을 닫고 한시간 청소후 집에 들어온후 다음날 10시 출근하면 또 격렬한 투쟁이
시작되던 하루 하루였습니다.

수없이 반복되는 종업원들의 사고와 불평의 큰 요인중 하나는 인종 차별이었습니다.
이유인즉 햄버거가 주 메뉴인 이 식당의 전 주인과 직원들이 백인이었고 대부분의 손님들도
백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새벽가까이에 주말이면 어김없이 빌딩 이곳 저곳 유리창이 박살이나고 보험회사가 손을 떼는
상황까지 가게되고 ..... 그후 빌딩에서 밤을 새우며 동네 십대아이들과 태권도 클래스를 열어
저녁 8시부터 약 한시간 훈련하던 기억이 납니다.
점차 직원들을 우리 이민 이세들로 채워나가며 문제들을 풀어나간후 새 메뉴와 새 아이디어를
얻기위해 유명 햄버거 식당들을 뒤지며 LA, 오래곤, 타코마.... 곳곳을 다니곤 했습니다.

약 이년가까이 투쟁의 역사로 밴쿠버 최고의 평판과 충분한 수익을 얻은 다음, 또 새로운 사업구상을 시작했습니다.
1980년 부터 시작된 새로운 사업의 탄생은 그후 약 이십년동안 일년에 대개 2-3 의 새로운 프로젝트로 밴쿠버 명소로 남을 사업체들을 탄생시켰습니다.

 1998년 2월, 두 아이들을 쥴리아드와 조지아 대학에서 음악석사를 끝낼쯤 나에게 우울증이
찾아왔습니다.
음악공부가 목적이었고 10년후 돌아가서 다시 나의 조국을 섬기겠다는 굳은 약속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고 공수표로 돌아온 지난 25년의 삶의 결과의 죄책감과 무력감때문에 그 펄펄 끓던 열정이 완전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후 잠못이루며 괴로워하던 어느날 밤, 드디어 텅빈 가슴속에서 화산이 터져나왔습니다.
나의 꿈을 아이들에게 전수하며 나를 위로했던 25년의 삶에 엉어리진 설움과 한이 화산처럼
터져나왔습니다.
불안 초조로 겨우 뜬눈으로 밤을 지샌 그날부터 극심한 불면증과 불안초조때문에 지독한 대인 공포증이 엄습해 왔습니다.
너무 심약해져서 혼자있는 시간에 항상 눈물로 보내야 했습니다.
신경안정제 없인 하루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폐인이 되어 갔습니다.
25년전 모시던 교장선생님의 충고, "자네 가슴에 불을 꺼야 하네. 그 불은 병이야!"
그말씀이 나의 가슴에서 계속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민 생활 25년동안 집념 하나로 살아온 나에게 밴쿠버 명소의 사업체들을 탄생시키며
두 아이들을 세계 최고 명문 음악대학에서 석사과정까지 성취시켰지만 내 자신은 지독한
우울증에 깊히 빠져 신경안정제없인 잠시도 견딜수 없을 위험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약 오년동안 약에 찌들어 있었고 약 오년동안 약을 끊기위해 투쟁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루 2시간씩 숲을 걸으며 깊은 명상과 하나님과의 대화로 가슴속에 무섭게 타오르던
불을 10년후 잠재울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그렇게 고통스러운 가운데도 사업은 계속 성장하여 많은 직원들이 우리 혼의 가족으로 열심히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소수민족 출신으로 새로 이민온 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제가 낳은 자식들은 아니지만 제가 키우는 자식들이므로 제 혼의 자식들이지요.

2000년 후반부터 다시 일막 이장의 새로운 이민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제 베풀고 섬기는 삶을 살아가자!
이제 피아노 소나타의 결론을 지어야 한다!
나의 삶의 결론을!
비록 조국과의 약속을 어긴 나였지만 이제 조국을 떠나 새로운 삶을 찾아 이민온 젊은이들을
나의 친자식처럼 위하고 사랑하며 훌륭하게 키워나가자!
내가 몸으로 낳은 자식들은 완전 독립하여 전문 음악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나
나에겐 수많은 혼의 자식들이 병아리처럼 나를 따르니 이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고 관심을 베풀며 제 2의 Simon Lee, 제 3의 Simon Lee로 살아가게 하여 이 사회, 이 나라에 공헌하는 위대한 사회인으로 키워 나가게 하자."
이 결론이 하나님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저의 새로운 약속이었고 또 펄펄 끓는 소망이었습니다.

2006 년 1월, 캐나다 실업인 협회로 부터 2005년 중소기업인상을 받는 자리에서 남은 삶을
돕고 베풀고 섬기는 삶을 살겠다는 약속에 약 5백여명의 지도층
인사로 부터 기립박수를 받으며
감사의 눈물을 하늘에 드렸습니다.

이제 지난 이민 40년을 되돌아 봅니다.
처음 몇년은 생존을 위하여 전력투구했습니다.
그후 약 20년은 번창하는 사업과 제가 낳은 아이들의 성공을 위하여 혼신을 다한 시기였습니다.
그후 약 7-8년동안 무서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갔습니다.

아!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않는 그 죽음의 골짜기에서 밤 12시 이후이면 어김없이 닥아오던 죽음의 그림자,어릴적부터 경험했던 수많은 가슴아픈 사연들이 줄줄이 고개들고 일어나 밤새 고문을 하며 아침이 되어야 사라져가던 악한 세력들......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로운 약속과 새로운 소망을
가슴에 가득히 담고 소중한 결론을 위하여 오늘도 최선을 다하렵니다.

삶은 여행입니다!
모든 만남은 소중하게 간직하며 이 유한의 세계에서 언젠가 다시 떠나야할 영원의 세계를 향한 마지막 이민길을 위하여,나누고 위하고 사랑하고 섬기며 이 지구라는 별속에서 한국인으로 태어난 이 인연을 감사하며 선하고 진실되게 살아갈것입니다.

밴쿠버 캐나다에서.

시몬.